워케이션 아니고 베케이션 in 제주
혹시 퇴사한 건 아니냐구요?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된 수습이 어떻게 이틀씩이나 휴가를 갔는 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텐데요. (사실 하나도 안 궁금한거 다 앎) 대표님이 해외 일정 기간 동안 사무실 인원들에게 이틀 동안 급!휴가를 제안하신 관계로 발생한(?) 일들을 나름대로 소소하게 엮어보려고 해요.
처음 휴가를 제안하셨을 때, "와, 이틀이나 쉴 수 있다니! 주3일 출근 개꿀" 이라는 생각보다는 "뭘 해야하지.." 라는 파워 J의 콘텐츠 고민은 시작되었죠. 서핑? 너무 추운데. 여행? (남편 포함) 같이 갈 사람이 없는데. 퇴근길에 동료분과 이야기 나누다가 "근데 저 뭐 하죠?" 하니 아무것도 안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하시던...ㅎㅎ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까, 생각하던 찰나에 <제주도 워케이션> 이라는 광고가 떴습니다.
역시, 알고리즘은 제 마음을 읽은 걸까요?
하지만 다시 한 번 정확히 하자면, 워케이션(workation)이 아니라 베케이션(vacation) 입니다.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 속을 스쳐지나갈 때, J의 계획은 시작되는 법
1) 항공권을 찾는다 2) 숙소를 찾는다 3) (1박 2일을 2박 3일처럼 지낼 수 있는) 알찬 콘텐츠를 구성한다. 최저가 항공권과 게스트하우스 1인실 숙소를 예약 완료하고 콘텐츠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강아지 2마리와 함께하는 아침 산책 프로그램을 제공하니 사진도 찍고 운동도 다녀올 수 있겠어요. 그리고 숙소가 성산읍에 위치해 있어 근거리의 프릳츠 성산점을 갈 수 있더군요. '힐링'이 테마이니 너무 꽉꽉 욱여넣지 말고, 여기까지만 채우자하고 생각날 때 나머지 콘텐츠를 보충하기로 마음먹었죠.
하지만 왠지 J의 마음은 불안합니다. 제주도까지 간 김에 서핑을 해볼까 싶어 도전을 감행해보기로 했죠. [저기 아직 서핑 영업하시나요?] 라는 텍스트와 전화를 세군데 업체에 물어봤는데, 영업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최종적으로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왜죠?) 그래서 부랴부랴 또 생각을 해봅니다. '기록을 남겨보자' 제주에서 웨딩촬영은 해봤지만 혼자 촬영은 한 번도 도전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동편이 불편하지 않은 곳 중에 1인 사진이 가능한 업체를 예약했습니다. 드디어, 예약 완료_최최최종의 건.
떠나요, 제주로!
3시에 김포에서 비행기를 탑승하고 공항에 내리기까지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즐거움 반, 설레임이 반이었는데. 동절기에는 해가 이렇게 빨리 떨어질 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공항에서 2시간 걸리는 숙소가 위치한 성산읍 오조리는 오조포구 일몰이 유명하다는데, 일몰 시각은 이미 17:30 이었고, 비행기에서 내릴 무렵에 이미 해가 지고 있었어요.
숙소가는 급행 버스(라 부르고 1시간 30여분이 걸리는)를 타고 제주시부터 성산까지의 머나 먼 여정에는 배낭 대신 캐리어를 가져온 것에 대한 후회가 함께했습니다. 각종 교통수단을 오르고 내릴 때 경험할 수 있는 데드리프트 (이럴려고 크로스핏 한 게 아닐텐데?), 울퉁불퉁한 길을 핸들링 할 때 느낄 수 있는 손목통증은 덤이죠. 역시, 차 없는 여행은 배낭이 최고다. 사서 고생을 하며 또 하나의 경험치를 쌓아갑니다.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와 함께 귤밭을 굽이굽이 돌아 숙소에 도착하고보니, 어느 새 저녁 7시가 슬쩍 넘어갔습니다. 고양이가 맞아주는 문 앞에서 체크인을 하자마자 허겁지겁 동네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식당에 달려 갔어요. 하지만 아무도 없는 컴컴한 기운이 엄습해오고... 문을 닫으신거죠.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요, 됩니다 배달. 그래서 고민 끝에 제주산 고등어회를 시켜먹기로 합니다.
마침 대한민국:중국 월드컵 예선전 축구 경기가 시작되어 운좋게도 맥주 한 캔과 함께 방구석 응원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보다 좋은 진수성찬이 있을까요? 3:0의 대승과 함께 제주에서의 첫 날이 저물어 갑니다.
많은 제주 숙소 중에서 굳이 이곳에서 1박을 머물렀던 이유가 있겠죠? 귀여운 강아지와 아침산책 프로그램 (강제사항 절대 아님)을 제공하고 있는데, 10시 출근러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시간인, 무려 7시 45분에 기상을 해보았습니다. 다른 1인실을 쓰신 게스트분과 호스트분, 호삼이(강아지) 넷이서 산책길에 나섰어요. 외투도 없이 맨투맨 하나만 걸치고 나갔는데도 정말 하나도 안춥다!! 날씨 미쳤다!!를 연발하며 걸어가는 길에, 바다도 아닌 그냥 자연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거에요. 눈물이 났죠. 아? 나... 이걸 보려고 여기 왔구나.
나만 보기 아쉬우니까 조금 더 보여줄게요. 오조리에 오시면 오조포구에서만 사진찍지 말고 안쪽까지 들어오면 이렇게 예쁜 풍경을 볼 수 있어요. 현재 이곳에서 웰컴투 삼달리라는 드라마 촬영도 하고 있다고 하네요. 안 쪽에 버스정류장 같은 세트장도 위치하고 있어요.
+) 동네 런닝이 아닌 워킹이 끝나면 #오조리러닝클럽 스티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소한행복 추가
눈이 즐거운 산책을 마진 후, 화요일과 수요일이 휴무인데 잠시 문을 열어주셔서 언타이틀 보틀샵 구경을 잠깐 프라이빗하게 해보았습니다. 원래는 B일상 잡화점이었던 곳이, 보틀샵으로 새단장을 했다고해요. 잡화점에서 보틀샵으로 바뀌긴 했지만 아기자기함은 유지하고 있어요. 근데 언타이틀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냐 물으신다면 대답 해 주시는 것이 인지상정인 호스트분께서 운영하시는 분 이름이 미정이라...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실화임) 무튼 프라이빗하게 쇼핑하게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호스트님께서 주문한 조식을 준비 해 주시는 동안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어요. 그러고보니 나, 날씨 도파민에 취해서 아침부터 쉬지않고 정말 열심히 돌아다녔구나! 마침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 섭외되어 영상과 사진도 찍었는데요, 누나가 츄르를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2차는 없었다고 한다)
✔️ 그리고 이거슨 광고가 아니고 (맞음) 지금까지의 오조리를 맛보고 싶다면 약간 B급 감성의 영상으로 대애충 컷편집을 한 유튜브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많관부 워케이션 아니고 베케이션 in 제주 첫번째 이야기
맛있는 조식을 먹고, 다시 짐을 꾸려서 힘차게 2일차 여정을 시작해봅니다. 렛츠고!
프릳츠까지는 숙소에서 버스로는 한 나절인데, 택시로는 7분 거리여서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기사님 친절도가 별 다섯개였는데, 갑자기 성산도 아닌, 카페 앞에 세워달라니 진짜 여기 맞냐고 3번 정도 물어보셨는데요... 네 여기 맞아요 슨생님. 수요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어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햇볕 뜨거웠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놓고 앉아서 통창 너머의 성산을 바라보는데, 또 눈물이 맺힐 뻔.
아, 이것이 꿈이라면 제발 깨지말아주세요.
프릳츠 방문을 유독 부러워 하신 사무실을 지키고 계신 동료님께도 사진을 보내드리고, 슬랙 채널에도 자랑을 해보았어요. 이로써 우리의 vacation 멋지게 보내기 자랑 대회는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그냥 발길을 돌리기 아쉬워 프릳츠 앞 쪽에서 즐겁게 대화 나누고 계신 분들이 있어서 사진을 한 장 부탁드렸어요. (무려 귀한 독사진을 폴라로이드로!) 용기내어 부탁드려서 인생샷 얻어걸렸다고 합니다. 그분들도 기념으로 폴라로이드 한 장 찍어서 드리고, 통성명을 하고 보니 지구별가게에서 워크숍 오신 분들이었어요. 지구를 살리는 소소한 즐거움을 컨셉으로 제로웨이스트 제품을 판매하신다고 하네요. 예전에 비영리에서 일하던 때가 또 생각이 나고... 인스타를 보니 팀워크를 다지는 멋진 연말 워크숍이었을 것 같았어요. 나중에 제주시 들를 일 있을때 잊지않고 꼭 한번 가보는걸로!
이 죽일 놈의 망함 구간이 또
망함 구간이론이라는 짤을 얼마전에 본 적이 있어요. 도약 직전에 발 빠지는 망함 구간이 존재하다는 이론인데. 지금까지 너무 순탄했던 여정에서 망함 구간이 존재하지 않은게 이상하잖아요? 네, 실제로 그것이 존재했습니다. 2시가 예약 시간인 마지막 여정지로 가는데 버스를 반대로 탄거죠. 어쩐지 네이버 지도를 보면서 가는데 소요시간이 실시간으로 쭉쭉 늘어나더라니.
전 그것이 반대로 가는 버스인 줄도 모르고, 아 차가 막히나 보다 생각했더랬죠. 예약 시간을 약 20여 분 앞두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 예산에서 택시는 기본요금거리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눈물을 머금고 택시를 불렀습니다. 도파민에 취해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망함 구간'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진실을 여기서 또 한번 깨닫고 가네요. 그리고 택시는 달리고 달려 다행히 제 시간에 도착해서 예약시간을 겨우겨우 맞췄습니다.
※손, 발 없어짐 주의※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뭔가 전문가의 포스가 물씬 나는 작가님이 계셨는데요. 대충 준비를 끝내고 컨셉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이른바 '돌 담 앞에서 귤 파는 언니 컨셉'이랄까요. 상큼함으로 온 몸을 무장한 것 마냥 귤을 들고 난리 부르스를 쳤습니다. 웨딩촬영을 해봐서 이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겠지, 생각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예쁘고 귀여운 척을 '혼자' 하는 도중에 현타가 와버림... (아...?) 그래도 작가님은 프로의식으로 여러가지 포즈를 주문하셨고 저는 그것을 그대로 이행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의 결과물은, 두둥 탁!
그래도 이렇게나마, 제주에서 또 한 장의 추억을 남기고 갈 수 있어 보람 찬 하루가 되었네요. e북으로 조직문화 책 읽고 글 써야지, 생각했지만 축구볼 때 빼고는 펼쳐보지도 않은 (애물단지) 아이패드. 선물같은 베케이션으로 일 생각 1도 안하고 잘 즐기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길게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길어져서 (긴급) 요약해볼게요.
- 가장 잘한 것: 재력과 체력을 아낀 것 = 자제력
- 가장 잘못한 것 : 캐리어를 끌고간 것 (할말하않)
- 뜻밖에 어쩔 수 없었던 것 : 패딩과 스웨터 (태세전환급 기온)
- 뜻밖에 즐거웠던 것: 다같이 아침 오조리 동네 한바퀴 (w/호삼)
- 뜻밖에 수확한 것: 성산포 소주 (술이 술술)
- 다음에 올 때 할 것: 운전을 배워올 것... 그리고 더 많은 체력과 재력
늘 집 떠나면 고생이지만, 결국 혼자서도 해냅니다.
입사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워케이션 아니고 베케이션을 이틀이나 제공해주신 대표님과 사무실을 지켜주신 동료님께 감사를. 쿨하게 이틀 휴가를 주신 덕분에 많은 영감과 추억과 동력을 얻어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도 베케이션 주시면 더 알차고 잘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일도 좋고, 워케이션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 수습나부랭이 이니까요.
끝!
기업의 조직문화와 철학을 기록하는 인터널 브랜딩 회사에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