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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Jan 25. 2021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 자기 결정 〕


책 리뷰,

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학교 등에서 시험 때문에 공부하듯 소설을 읽는게 아니라 순전히 내 의지로 소설을 찾게 된 것은 작년부터의 일이다. 그 전까지 나는 에세이나 인문학 장르를 주로 좋아했다. 특히 <여행의 이유>나 <모월모일>을 냈던 문학동네의 에세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 문학동네에 대한 관심은 '북클럽 문학동네'라는 시즌제 멤버십 결제까지 이르게 했는데, 멤버십 결제 후 처음 받았던 책 중에는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라는 단편소설집이 함께 있었다. 당시 나는 소설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돈 내고 받은 책이니 안 읽으면 아까우니까, '한 번 읽어보지 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나는 자발적 소설 읽기를 시작했다.


 모든 처음에는 낯설음이 있다. 나에게 특히 그 소설집은 더 그랬다. 수록된 소설마다 그려진 세계는 낯설음으로 가득했다. 강화길 작가의 <음복>에서 남성은 '모르는 것' 자체로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 최은영 작가의 <아주 희미한 빛에서도>에서 대학 강의 도중에 여성은 생리로 인해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소설을 읽으면서 마주한 이런 낯설음들은 매끈하고 안전했던 내 사고방식을 차례차례로 허물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감정은 그런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구나. 쉽게 누군가를 '안다' 혹은 '이해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자기 결정'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고,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페터 비에리는 자신의 책 <자기 결정>에서 말한다. 스스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따라서 삶의 순간마다 '자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엄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자기에 대한 이해, 자기에 대한 인식은 나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단단히 다져진다.


자기 자신과의 이러한 거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식과 이해의 거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과 소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러한 성찰의 사고방식에는 아주 중요한 생각이 하나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것을 느끼고 원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인식입니다. (……) 자기 결정은 가능성에 대한 의지력, 즉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14쪽)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기. 페터 비에리는 이와 같은 '자문을 통한 인식'의 과정을 넘어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표현'하는 행위가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표현에는 글쓰기가 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상을 가장 적확한 언어로 부르는 것. 집요한 관찰을 통해 그 대상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 김춘수 시인의 <꽃> 처럼, 너에게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너와 나 사이의 관계에 유일한 의미로 관계를 채우는 것. 이러한 표현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의 고유성 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이 각기 고유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다름을 이해하는 통로, 문학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다. 우리는 선과 악, 이분법의 세계에 익숙해져 있다. 뉴스에서는 언제나 특정 사안을 놓고 '좋고 나쁨'에 대해서만 토론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언가의 고유성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그것이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만 대충 감 잡으려 할 뿐이다. 현대에서 자기 인식으로의 과정이 험난한 이유다.


 문학의 역할은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문학은 나와 다른 삶의 형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도록 언어로 대신하여 표현해준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 표현, 그들이 느끼는 감정 등 우리는 문학을 통해 그들만의 우주를 엿보고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들에게서 표현을 빌릴 수도, 혹은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여 나 자신이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문학이 있습니다. 문학은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요? 읽기와 쓰기가 자기 결정력을 습득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문학작품을 읽으면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립니다. 인간이 삶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읽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 이제 상상력의 반경이 보다 넓어진 것입니다. 이제 더 다양한 삶의 흐름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직업과 사회적 정체성, 인간관계의 다양한 종류를 알게 됩니다. (28쪽)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삶에도 공감할 수 있도록 서로를 연결해준다. 뉴스 기사의 제목만으로 가치 판단을 했던 그 사람들의 실제 삶의 형태를 문학을 통해 만나면서 우리는 그들의 삶에 다가간다. 내가 <음복>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그들의 삶을 아주 조금이나마 체험했던 것처럼.


 철학자 들뢰즈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삶과 만난다. 그 마주침은 상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까지 이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와의 거리를 최대한 좁힐수는 있다. 공감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일. 그럼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일.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희미하고 미약했던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공감과 이해와 배려의 나아감이다.



이야기로 가득한 삶


 요즘 나는 정영수 작가의 소설집 <내일의 연인들>을 읽고 있다. 국내 문학의 매력에 빠진 지 이제 겨우 2년차. 내 삶이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재밌어졌다면 그 이유는 첫째로 소설을 읽으면서 다음 소설을 무엇을 읽을 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소설이란 것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염려가 없고 매일매일 재밌는 소설이 한가득 출판되기 때문에 소설 읽기라는 나의 취미는 네버 엔딩이라는 것이다. 다음에는 어떤 소설을 읽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 내 삶은 어느새 매번 새로운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하고,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하고 좌절을 안겨주거나 때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메세지를 남겨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야기로 가득한 삶이란 감정의 스펙트럼, 감정의 낙차가 더 넓어진 삶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감정의 선택지가 더욱 많아진 삶. 나는 이 선택지를 타인에게 공감하고 싶을 때 자주 꺼내보려 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상대의 감정에 다가갈 수 있도록 내 감정의 선택지를 열심히 뒤져보는 것. 그렇다. 공감하기 위해 나는 문학을 읽는다.


#김영하북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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