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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h Mar 14. 2020

전쟁같은 삶을 사는 당신에게

〔 휴전 〕


소설 리뷰,

마리오 베네데띠 『휴전』




 가방의 본질은 짓누름, 삶에 대한 이 짓누름의 무게는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도달한다. 출근길 지하철에선 온갖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방을 메고 있다. 그러나 삶의 끝없는 무게를 견디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똑같은 존재다. 개성이 결여된 그들의 색조는 잿빛이다. 걸음마를 갓 배운 아이에게 도시락 가방을 메어준 부모는 그것이 곧 짓누름의 시작임을 알지 못한다. 현실의 고통은, 이른 아침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깨자마자, 짓누름의 가방을 메고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실재한다. 그에게(즉 모두에게) 삶은 곧 전쟁이다. 전쟁터에서 군인의 복장은, 우리에게는 가방, 근무 복장, 교복 등 짓누름의 형상으로 뒤바뀌었을 뿐이다. 도시의 초상은 오직 짓누름과 잿빛으로 재현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진짜 현실이니까.


 삶이 전쟁이라면, 전쟁의 상대가 궁금해진다. 우리는 누구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아와 전쟁터만이 존재하고 상대방(적)은 모습을 감춰버렸다. 누군가와 직접 싸우지 않으면서 전쟁은 계속되고, 전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운명이다. 쓰러뜨려야 할 적도 없으니 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인생 속 잠시 찾아오는 기쁨, 행복, 환희 등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들은 지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금새 흩어져 소멸한다. 우리가 잠시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 순간 우리는 전쟁터에서 빠져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잠시 '휴전'을 한 것일 뿐일까? 운명과의 휴전. 운명이 갑이고 우리는 을이다. 따라서 일방적인 휴전이다.


아무리 우리 자신을 평균인으로 느낀다 해도 우리들 각자의 삶은 진부하고 어리둥절한 싸구려 드라마다.


소설 <휴전>


 우루과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대중 작가 베네데띠는 소설 <휴전>을 통해 우리를 현실과 직시하도록 이끈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다보니 우리는 되려 이 소설이 낯설다. 찰리 채플린은 '과장'을 통해 잿빛 사회를 풍자했다. 반면 <휴전>은 우리에게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도록 질 높은 안경을 씌워주는 것과 같다.


 소설 속 주인공(산또메)은 퇴직을 앞둔 중년의 남성이다. 모든 것에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그는 동시에 직장에서 인정받는 인물이다. 소설 속 배경인 우루과이는 당시 고도의 관료제를 사회에 주입하는 과정에 있었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관료적 인물이다. 삶의 목적성이란 그에게 무의미하다. 관료제의 상명하복 체계가 곧 그의 인생이다. 그저 사는 대로 사는 삶. 그랬던 그는 돌연 20대 초반의 직장 후배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잠시 그의 인생에 행복, '목적 있는 삶'이 반겨오는 듯 했다. 그러나 소설 말미에, 작가는 가장 무의미한 방식으로 그 관계를 파괴한다. 단 두 페이지, 여성이 '심장 마비'로 인해 죽었다는 묘사가 백 페이지 넘는 산또메의 사랑의 서사를 부정하고야 만다.



잿빛 현실


 주인공은 염세를 외치며 소설은 끝난다. 잿빛으로 가득했던 주인공을 분홍으로 물들이고 있었던 그녀와의 사랑은 단순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독자는 당혹감을 느낀다. '특별한 관계'의 끝은 그것의 시작처럼 '특별해야' 한다는 소설의 불문율을 전제로써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네데띠는 더할 나위 없는 무의미한 죽음과 파괴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실재하는 삶은 소설처럼 특별하기 어려운 법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작가 밀란 쿤데라는 체코 노동자의 떼죽음, 유대인들의 대학살에도 세상은 여전히 지속한다는 사실에서 한없는 무의미함을 찾는다. 그렇다. 현실은 무의미하다. 보바리가 그토록 갈구했던 '낭만'은 허구였던 것처럼. 참으로 무의미한 삶. 베네데띠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했다. 나체의, 벌거벗은 형상으로.


 <휴전>을 통해 우리는 염세를 목격한다. 현실과 가까이 마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잿빛 가득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통해서는 우리는 삶의 희망, 혹은 환상을 얻는다. 그런 작품들은 우리에게 마치 영원한 젊음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것이 결여된, <휴전>같은 작품은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늙어서 병원에 자주 드나들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날 때, 비로소 <휴전>의 삶이 곧 '진짜 삶'임을 뼈저리게 목격한다.


염세의 운명에 던져진 우리


 우리 모두는 <휴전>의 산또메가 되기를 거부하지만, 실은 자신이 산또메가 되어가고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의 '목격'에 있다.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운명을 헤쳐나가는 것을 강조했듯, <휴전>을 통해 우리는 잿빛 삶을 재확인하고, 위선적인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자아의 근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의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으며,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의 '휴전'이 아닌 '전쟁에서의 승리'를 거머쥘지도 모른다. 작중에서 '좌파' '공산당' 등 이념의 문제는 노인들의 입을 통해서만 언급되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낡은 이념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이념이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작품 해설자의 말처럼, '이 소설이 단순히 연애소설로 읽혀서도 곤란한 이유'는 정말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목적없이 던져진 존재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스스로 던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삶의 운명에 의해 던져진 우리는 때때로 휴전의 시기가 찾아오기는 하지만, 이에 만족한다면 여전히 수동적인 인간에 머무를 뿐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 아이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는 자라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 하지만 그에 굴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휴전>을 통해 세상에 대한 끝없는 비관보다는 오히려 염세를 극복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잿빛 현실, 그 가운데 스스로 어떤 색깔을 발하는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휴전>을 읽으며 모두가 비관보다는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창비세계문학리뷰대회 (본문 3등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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