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0 - Day.3 | 나는 왜 무턱대고 이걸 신청했을까
2024.05.08 - 2024.05.19
10일 수련 코스를 신수련생으로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코스에 참석하기 전 검색으로 이 글을 발견하셨다면
개인적으로는 읽지 않고 다녀오시길 추천하고 싶어요.
다녀와서 읽으시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
바와뚜 삽바 망갈랑
MAY ALL BEINGS BE HAPPY
이 글은 Day.10 침묵이 모두 해제된 이후 그간의 이야기를 잊기 싫어 일필휘지로 써두었던 메모를 옮겼다. 위빳사나 명상을 위한 담마코리아에서의 11박 12일은 잔잔하고도 강렬한 기억이었다.
무언가를 가까이 볼 일이 10일 동안 없다가 오랜만에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려니 눈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위빳사나 하다가 이른 노안이 온 건 아니겠지...
위빳사나 명상 내내 나는 흉통, 등 통증 등 몸통의 불편감이 컸다.
물론 다리도 엄청 저리고 아팠지만 나중에는 도가 터서 다리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생각나는 게 너무 많고 말하고 싶고 쓰고 싶은 게 진짜 많았다.
어쨌든 Day.10에 남기는 이 코스의 한 줄 평은...
meaningful
Day.0
센터 정문에 들어갔는데 안내하는 사람이 없었고 안내 표지판에 나와있는 글귀를 따라 알아서 해야만 했다.
버벅거리며 신청서를 쓰고 사무실에 갔는데 어리바리한 표정에 나에게 바로 휴대폰을 제출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갑자기 시작인가?' 싶었지만 되돌아 나올 수는 없었다.
방 사진을 꼼꼼히 찍어가고 싶었다.
중국 시골 마을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기숙사 혹은 DTS를 받을 때의 잭홈 컨디션과 거의 흡사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 흘렀는데 비슷한 환경(휴대폰 사용 불가, 단체 생활, 침묵 유지 등)에서
또 인생을 돌아보게 됐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저녁 명상 시간에는 호흡 명상을 위한 가이드를 들으며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쯤 떠올랐다.
붓다의 명상법이라는 소개로 시작해 알아듣지 못하는 불교 용어가 난무했고 구수련생-신수련생 사이의 불친절한 정보 격차로 머리와 마음이 복잡했다. 외롭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는데 오히려 침묵이라는 규율이 그 외로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모두가 어떤 정보값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 알 수 없기 때문. 답답하다기보다는 안전하게 만드는 규율이라고 느껴졌다.
꿈자리가 매우 험했다. 몸이 자꾸 확장되고 분리되는 느낌에 밤새 잠을 설쳤다.
(추신) Day.10에 떠올리는 기억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코스가 시작되기 전에 산책길을 걸었는데 코스 시작 후에는 센터의 모든 공간이 남/여 공간으로 나뉘었다. 남성이 사용하는 공간 쪽의 산책길이 더 내 취향이었기 때문에 아쉬웠다. (명상 선생님이 들으면 '내' 취향이라는 말을 싫어하셨겠지만...)
Day.1
호흡법 명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코를 중심으로 콧대, 코 내부, 콧볼, 콧구멍 입구, 인중, 윗입술까지 삼각형을 이루고 호흡의 오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Day.2에 이걸 하고, Day.1에는 그냥 호흡 알아차리기만 했었나 가물가물하네..)
폐렴 후유증인지, 기관지나 목이 약해진 건지 기침 가래를 명상 내리 달고 있었다. 고요한 명상홀에 내 기침 소리가 울릴 때마다 한 명의 빌런이 된 기분이었다. 가장 미안했던 건 양 옆에서 명상하는 분들에게였다. Day.4,5쯤 가면서야 기침이 나아졌다.
잘 자고 싶어서 베개 방향을 바꿨다. 휴대폰이 없어 검색을 할 수 없으니 뇌세포 저변에 있는 풍수지리학적 지식을 꺼내...고 싶었지만 영 변변찮은 지식들 뿐이었다. 어쨌든 왜인지 남향이 좋을 것 같아 남쪽으로 추측되는 방향으로 베개 방향을 바꿨다. 잠자리가 조금 더 편해졌다.
Day.2
오전 4시, 다이소에서 사 온 알람시계가 삐빅 삐빅 하고 울리면 눈이 번쩍 떠졌다.
새벽 명상 전까지 샤워를 하고 나가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방에서 나가 샤워실로 향해야 했다. 파워 J처럼 머릿속 철저한 타임라인에 따라 샤워를 하고, 공용 드라이기를 방으로 챙겨 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담요를 두르고 숙소에서 나갔다. 안개가 짙게 껴 전날 밤 형형하던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호흡법 명상을 계속했다.
새벽 명상(4:30-6:30)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기침 가래가 여전히 심했고 주변 수련생들에게 미안했다.
건강을 핑계로 퇴소했다가 나중에 건강한 컨디션일 때 다시 신청할까 하는 생각이 샘솟았지만, 명상 선생님이 정말 권위적이고 무서워 보였다. 저 분과 면담을 하고 설득을 이겨내고 퇴소 절차를 밟을 생각을 하니 쫄보인 내게는 꽤나 버겁게 느껴졌다.
Day.3
호흡법 명상을 계속했다. 이제는 감각을 인지하는 범위를 아주 좁혀서 윗입술을 밑변으로 콧구멍 입구까지의 작은 범위에서 감각을 느껴보는 호흡법을 연습했다. 선생님이 이 정도의 범위에서 미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면 몸 전체 어디에서나 감각을 관찰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선생님 면담을 처음 했다. 질문은 아마 두세 가지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분명 5분 이내로 질문을 준비하라는 안내 멘트가 있었지만, 앞 순서들이 매우 길어져서 대기가 길어졌다. 시간 약속에 예민한 편이 아닌데도 체계 없음에 짜증이 나는 것을 보며 내 안의 FM 성향과 통제욕을 인지했다.
Q1. 코가 막힐 땐 호흡 명상을 어떻게 하나요?
A1. 자연스럽게 (입으로) 해도 된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코로 하는 것이 좋다.
Q2. 기침이 자꾸 나는데 필수 단체 명상 외에는 (아무리 명상홀에서 하는 게 좋아도) 개인 숙소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선한 사마디(행동)일까요?
A2. 당연하지.
Q3. 좋게 말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나쁘게 말하면 좀 침울해지는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과정일까요? 아니면 제가 이 명상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요?
A3.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된다.
되돌아보니 질문이 너무 간단하고 일차원적이다 싶지만 당시에는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선생님과 1:1로 면담하는 것이 겁도 나고 무섭기도 했다.
특히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하는 큰 기쁨이 중요한 가치인데, 이 명상법이나 이론에 따르면 뭔가 회의적이거나 염세적으로 세상과 감정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고민이 되었다. 자유 시간에 산책을 하며 내내 머릿속으로 '기쁨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법문 시간에, 고엔카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의 1991년 법문 영상을 시청했는데, 무려 30여 년 전의 영상인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수련생들이 느끼는 바는 시간에 따라 비슷했던 것 같다.) 이 명상은 절대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와 평정심을 유지하고 오히려 세상을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 면이 훨씬 강하다고 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