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신났던 서울 올라오던 날을 기억한다.
서울로 대학을 붙고, 마냥 신나 서울로 향하는 기차를 타던 그날을 기억한다.
우리학교는 특이하게 1학년 전체가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고,
나는 입학식은 빼먹었지만 OT에서 만난 선배들과 만나 술을 마시는 날에 맞춰송도, 서울로 영영 올라갔다.
대학생활의 뽕에 취해, 술마시러 서울을 향하던 그날은 몰랐지.
나는 그날 이후로, 웬만하면 대구에서 가족들이랑 같이 살일이 없으리라는걸.
너무 마음이 들떠서, 아무렇지도 않게 철없이 서울로 향했던 그날이 아직도 두고두고 생각난다.
자취는 나에게 특권이자 독, 양날의 검이었다.
첫차가 끊기는 11시반쯤 무렵이되면, 대학동기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졌다.
첫번째는 통금시간이 있어, 눈치를 보며 슬슬 집으로 향하는 가족들과 함께 사는 친구들
그리고 두번째는 통금시간 없이, 밤새도록 시계를 보지않으며 부어라 마셔라하는 자취하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물어보나 마나, 두번째 무리에 속했고 (별일없으면) 대학시절 내내 술자리의 마지막에 남아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아있어 흑역사를 쓰거나, 처참한 내 대학교 1-2학년 성적표를 볼때마다
"내가 자취를 안하고, 가족들이랑 살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곤했다.
그렇게 나는 아직 8년째 부모님과 떨어진 자취 생활을 하고있다.
대학시절까지는 자취가 내게 미치는 영향 (과음, 낮은 학점, 잦은이사..)를 오로지 '나'의 입장에서 득실을 계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에는 나의 자취, 서울살이가 우리 부모님한테 미치는 영향을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하나둘씩 몸이 고장나는 엄마
최근 건강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크고작은 수술을 하셨다. 다행히도 우린 가까이 살기에, 엄마가 병원도 제때 데리고 가시고,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 회복할 동안 같이 살기도 하고 하셨다. 병원가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본인의 증상을 진단받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어르신들에게는 매우 지난한 과정이라고 한다.
나이가 든다는건 어쩔수 없는 일인지 그렇게 정정하셨던 어르신들이, 갑작스럽게 아프신걸 보니 나이앞에서 장사 없다는 생각에 서글퍼지면서도, 한편으로 주변에 가족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또 한편으로는, 만약 우리 엄마아빠가 아프면, 내가 저만큼 잘 챙길 수 있을까. 매일 같이 병원에 가고, 부모님을 집에 모시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도 클리셰처럼 나오는 장면이, 자식들이 미국에 있어서 아픈 부모님을 잘 못찾아뵙는 장면이다.
자식들 잘 되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가며 서울,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럴수록 자식들은 부모에게서 물리적/정서적으로 멀어지고, 부모님들이 진짜 자식을 필요로할 나이에
옆에 있어주지 못한다는게 참 아이러니다.
엄마가 어깨 디스크가 심해지셔서, 책읽을때 쓸 독서대가 필요하다고 해서 바로 쿠팡에서 사드렸다. 단 15000원짜리 독서대일 뿐인데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재택근무가 상시화되서 최근에는 종종 대구에 내려오지만, 사실 서울에서 전화/카톡만 할때는 엄마 아빠가 몸이 어떤지, 어떤 물건을 필요로하는지 알길이 없으니 답답하다. 부모님이 늙어가실때 곁을 지키는게 효도인거 같은데, 점점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건 어떻게 다뤄야 하냐고 묻는 아빠
한석규가 출연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스포 alert ! 심은하와의 가슴 저린 연애만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으나, 한석규는 시한부로 나옵니다.)
본인이 시한부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TV 리모콘을 못다루니 화내는 장면이 나온다. 단순히 그 순간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 혼자 남을 그 시간들에 대한 울분임은 너무 명백하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메일 계정을 만들어주고 나를 인터넷 세상으로 끌어내줬던 그 시절 아빠가, 이제는 쿠팡에서 생필품 결제하는것도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울분이 터진다. (물론 저는 건강합니다만,) 어쩌면 잠깐 지방에 내려가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딸은, 어찌보면 시한부로 당장 부모님을 챙겨야 하는 한석규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
우리 손을 잡고 전세계를 보여주던 엄마아빠가 이제는 우리의 가이드에 따라 해외여행을 할 때,
아빠가 만들어준 야후꾸러기 아이디로 겨우 플래시 게임을 접했던 내가 아빠에게 이커머스를 알려줄 때,
역할이 바뀐 미묘한 기시감이 마음을 아리게한다.
그저 좀 더 큰 세상을 맛보고 싶어 고향을 떠나 한양에 상경한 딸래미가
무심한 불효녀가 되는 아이러니, 아아-오늘도 한양에서 불효녀는 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