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타 불가, 손절 불가한 아주 특별한 주식
요즘 주식이 인기다. 코로나19로 코스피 1500선까지 무너질 때는 인버스, 곱버스가 핫하더니 다시 2000선을 회복하면서 '누가 어떤 종목으로 얼마를 벌었대'가 쉬이 귓가에 들려온다. 지난 5개월 동안 신용융자가 2700억이나 급증했고 20대에서는 이른바 빚내서 투자하는 '빚투'가 폭발적으로 확산된다고 한다.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빚까지 지면서 투자하는 행위에는 '단타'로 빠르게 '익절'하겠다는 희망과 혹시 실패할 경우 빠르게 '손절'해야 한다는 위험부담이 깔려 있다. 당연히 장투는 논외다.
그런데 장기 투자가 강요되면서도 손절하기 매우 어려운 주식이 있으니, 바로 드라마 속 러브라인이다.
보통 드라마 팬들이 특정 인물들의 러브라인을 응원하거나 몰입할 때 '주식을 산다'고 표현한다. 참 잘 어울리는 표현인 게,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감정이라는 것을 투입해 좋은 결과-즉 만족감-을 얻기를 기대하는 행위이니 주식과 꽤나 닮아있다. 다만 몰입감 덕에 중간 손절이 어렵고, 결과를 알기까지 방영 기간만큼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시스템 자체는 주식보다 독하다.
'주식 팔이'만 제대로 하면 드라마의 성공은 따라온다.
특히 삼각관계 로맨스나 역하렘(여성 중심으로 3명 이상의 남성과의 러브라인물) 장르와 같은 경우 주식을 얼마나 잘 파느냐가 드라마의 흥망성쇠를 가른다. 이전 <오 마이 베이비> 리뷰에서도 이야기했듯, '누가 봐도 안 될' 주식을 내놓고 팔려고 하거나 주식 팔이 자체가 잘 안 될 경우 드라마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반대로, 제대로 팔기만 한다면, 그리고 주식 선택지도 다양하다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청률 상승을 꾀할 수 있고 심지어는 이것만으로 드라마 한 편 뚝딱 나오기도 한다.
주식 팔이의 기본 조건은 '몰입감'
드라마는 몰입감 싸움이다. 다른 여타 콘텐츠와 달리 드라마는 연속성이 있는 콘텐츠를 장기간 몰입해서 시청하게 만드는 것이 미덕이요, 성공의 열쇠다. 러브라인 주식도 마찬가지다. 시청자가 인물의 감정선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감정의 대상'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감정의 주체'는 시청자다.
여성 시청자를 기준으로 할 때, 메인 여주는 주식 팔이에 있어서만큼은 시청자에게 주식을 소개하고 구매를 유도하는 길잡이가 된다. 메인 여주의 감정선도 중요하지만, 시청자에게 있어 그녀는 '남주 A는 이런 감정을 유발하고 이런 매력이 있는 사람'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아바타인 것이다.
결국 '잘 팔리는' 주식은 시청자의 마음을 뺏을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인지가 결정한다. 메인 여주의 감정이 어떻든 간에 시청자에게는 서브 남주가 더 매력적이라면, 시청자는 서브 남주와 메인 여주의 사랑을 응원하기도 한다. 여주에게 자신을 대입하면서 서브 남주와의 판타지를 꿈꾸기에 서브 남주의 주식을 '풀매수' 하는 것이다.
여기서 여주와 시청자 사이에 감정선의 괴리가 벌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유연석)-고애신(김태리) 의 경우, 이 주식을 매입한 시청자는 동매와 엇나가는 애신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백경(이재욱)-은단오(김혜윤) 의 경우에도 이 주식을 응원하는 시청자는 틈만 나면 백경에게서 멀어지는 단오를 보며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괴리감이 있다고 해서 몰입감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브 남주가 충분히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캐릭터라면, 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거나 조금이나마 내 주식이 오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더 몰입하게 되기도 한다. '희망 고문'에 가깝게, 짧게라도 내 커플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은 애타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더더욱 시청자를 몰입시킬 수 있는 매력도가 중요하다.
되는 주식 판별법
당연한 얘기지만, 매우 높은 확률로 '되는 주식'은 메인 남주-메인 여주다.
결국 드라마도 하나의 통일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메인들끼리 엮이는 것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포스터, 등장인물 소개, 시놉시스만 봐도 답이 딱 나오지 않겠는가. 특히 해피엔딩을 사랑하는 한드에서 메인 커플 주식은 절대 실패할 리 없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미스터 션샤인>처럼 엔딩이 새드인 경우나, <응답하라 1988>과 같이 메인 테마가 '이뤄지지 않는 첫사랑'일 경우다.
메인이 둘인 삼각관계에서 '되는 주식'은 보통 '베티와 베로니카' 구도 중 '베티'에 가까운 인물이다.
'베티와 베로니카' 구도란 미국의 국민 만화인 <아치 코믹스>의 두 히로인 베티와 베로니카에서 유래한 삼각관계 구도로, 평범하고 활기찬 베티와 거만한 재벌 아가씨 베로니카가 아치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구도다. 보통 순진하고 참하고 다정한 캐릭터가 베티형이고, 섹시하고 시크하고 츤데레스러운 캐릭터가 베로니카형으로 분류된다.
한드의 여성 대결 구도에서는 베티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여태껏 압승을 거둬왔다. 보통 베로니카형 캐릭터는 착한 베티를 괴롭히는 사악한 악녀로 그려지기 십상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가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캐릭터로 그려지면서 러브라인과는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숙종대 인현왕후와 장희빈 시절부터 내려온 유구한 역사가 아닐까. 사실 남자를 두고 경쟁하지 않더라도 거의 모든 대결에서 순진하고 착한 베티가 사악한 베로니카를 누르고 성공하는 것은 흔한 한드의 구조다.
반대로 남성 대결 구도에서는 드라마마다 다르지만, 여성 대결에 비해 주로 베로니카형이 메인 남주, 베티형이 서브 남주가 되는 경우가 훨씬 자주 있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윤지후(김현중),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정우)-칠봉이(유연석) 이 대표적인 베로니카 메인 남주의 승리로 끝난 작품이다.
혹은 베로니카형 남자의 2가지 다른 버전이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나쁜 남자' '츤데레'에 설레는 여성들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나쁜 남자가 끌리는 이유>라는 추억의 인터넷소설 제목처럼, <응답하라 1988>에서 '어남류'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되는 주식을 사야만 하는 이유
당연한 소리지만, 사실 이 문장의 방점은 '되는 주식'에 있다.
주식 매수 여부는 시청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망한(망할) 주식을 샀는지는 당신의 드라마 시청을 매우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망할 주식에 몰입한다는 것은 앞으로 웃음보다 눈물, 재미보다는 짠내가 풀풀 풍기는 서사를 봐야만 하는 가시밭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주행 중인 드라마라면 아마 중도에 꺼버릴 것이고, 실시간으로 달리는 드라마라면 역시 끝내 버티지 못하고 드라마의 결말을 기사로만 접하는 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드라마의 기본적인 서사나 감정선에 공감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드라마가 무엇을 이야기하든 간에 '내 커플' 말고는 다 악역으로 보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명작 드라마라도 기본적인 서사 구조에 공감되지 않으면 나에게만큼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특히 로맨스 드라마라면 - '서브남주 과몰입녀' 기준으로 - 메인 남주가 악역으로 보이고, 메인 커플을 행복으로 이끄는 드라마 속 세상이 원망스러워진다.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와 금잔디가 우연한 기회에 마음을 확인할 때 윤지후에 과몰입한 시청자는 혼자 울고만 싶고, 물에 빠진 금잔디를 구하러 구준표가 수영장에 뛰어들 때 그에 설레는 게 아니라 가만히 서있는 윤지후가 답답해지고.. 그런 거다.
나 역시 <향밀침침신여상>을 보기 시작한 지 2주가 되었지만 이 현상에 빠져버려 아직도 브런치에 리뷰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라운희가 서브남주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30화에 라운희가 오열하는 전설의 레전드 씬을 보기 위해 시작한 드라마인데, 역시나 서브남주 과몰입이 불러오는 모든 악영향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중이다. 46화까지 봤지만 차마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나머지 14개 회차를 볼 엄두도 나지 않는 데다가 심지어 리뷰를 적기 위한 객관적인 시각을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라 쓰더라도 제대로 된 리뷰가 나올지가 의문이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 드라마들에서는 때로 서브 남/여주에 대한 몰입을 깰 수 있는 서사를 넣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브에 대한 평판을 나락으로 빠뜨려버리는 것. 보통 이는 서브가 메인의 안타고니스트로 돌변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예를 들어 질투, 욕망, 권력 등에 눈이 멀어 흑화하고 이로 인해 비인간적,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거나 과하게 집착해 오히려 연모의 대상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등이다.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의 서브남주 8황자 왕욱(강하늘) 캐릭터가 그 예다. 사실 <달의 연인>의 경우 원작, 포스터부터 로그라인까지 분명 모든 방식을 동원해 해수(아이유)와 4황자 왕소(이준기)가 메인 커플이라는 것을 공표해놓고서는, 무려 16부작 중 10화 분량을 8황자와의 러브라인에 쏟고 심지어 혼인 약조까지 하는 장면을 넣어주며 8황자 주식을 한 바가지 팔아치웠다.
여기서 <달의 연인>은 여론을 뒤집기 위해 11화에 '8황자의 외면' 과 '4황자의 직진'이라는 두 장치를 배치한다. '권력을 위해 해수(즉 시청자에게는 '나')를 버리는 남자' 와 '나(해수)를 위해 권력을 버리는 남자'라는 정반대의 속성을 부여하고, 심지어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인 석고대죄씬에 '빗속의 연인에게 직접 우산이 되어준다'는 낭만적인 영상미까지 부여하면서 효과적인 여론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말하자면 서브남주 캐릭터를 망가뜨려 아예 몰입을 깨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대부분 드라마들은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서브 주식의 실패를 선언한다. 그렇다면 매수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1차로 떡락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2차로는 하필 이 주식을 매수한 자신을 탓하다가,
결국에는 너덜너덜해진 휴지조각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느냐, 혹은 뒤늦게 손절하고 메인 주식으로 넘어가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물론 주식을 샀다는 것 자체가 몰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후자는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될 주식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신 모두가 진짜 주식이던, 드라마 속 러브라인 주식이던 전부 성공하는 꽃길 투자만 하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