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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페베 Dec 29. 2020

2020년의 오피스 로맨스란, <반시밀당반시상>처럼

누가 중드에는 스킨십이 없다고 했나

날씨에 대한 인간의 기억력은 '개구리' 같다고 한다.

개구리 IQ라기보단, 어린이 동화에 나오는 개구리 모습과 같다는 것. 동화 속에서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바로 튀어나오지만, 찬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물이 서서히 데워지더라도 높아지는 온도를 인지하지 못하고 결국 가만히 익어버린다.  

미국의 한 연구팀에 따르면, 기후와 날씨에 대한 인간의 기억력도 이 동화 속 개구리와 같아서 인간은 이상기온이 닥치더라도 약 5년가량이 지나면 이것을 평범한 날씨로 인지한다고 한다. 마치 대한민국의 여름이 어느 샌가 37도, 38도를 웃도는 동남아의 후텁지근한 날씨로 변화했지만 우리는 별 것 아니라고, 여름은 당연히 더운 것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같은 연구에서 이상함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날씨에 대한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규명됐다. 감정 분석을 시도한 결과,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비정상적 기온에 대한 언급은 멈췄지만 폭염으로 짜증이 난다는 등의 정서적 표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즉, 우리는 변화에 대한 인지는 퇴화했지만 여전히 특정한 날씨나 기온에는 비슷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겨울이던 간에, 겨울 그리고 연말에 대한 정서도 변하지 않는다.얼마나 춥건, 춥지 않건 간에 겨울이 되면 호빵과 붕어빵을 먹으며 아이스 커피 대신 코코아를 마셔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같은 날씨, 그리고 시간대에 대한 정서는 미디어 수용 행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케빈 역할을 맡은 맥컬리 컬킨이 마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연말 영화로는 <나 홀로 집에>를 봐야 하고, 발매된 지 26년 된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올해에도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것처럼 말이다.



사흘 후가 내년인 지금, 겨울 특히 연말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중드로 <반시밀당반시상>을 추천한다.

직역하자면 제목은 '반은 꿀처럼 달콤하고, 반은 상처다' 라는 뜻으로, 사랑의 속성에 대한 표현이 되겠다. 제목만 봐서는 <동궁>, <학려화정> 류의 애증으로 가득찬 마라맛 드라마 같겠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함으로 가득 차있고 마라 구간이나 고구마는 10퍼센트도 안 된다. 고구마 구간이 이렇게 적은 중드는 <미미일소흔경성> 이후로 처음일 정도. 인물 감정선도 뚜렷해서 쉽고 가볍게 보기 좋다.

그나마 있는 고구마마저도 메인 커플 러브라인이 아니라 외부 상황에 관한 거라 타격감이 적은 편. 또 메인 인물들이 굉장히 똑똑한 덕에 사이다도 시원시원하고, 패악질 부리는 악역도 생각보단(?) 빠르게 퇴장한다. 러브라인도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는 게 조금 늦을 뿐이지, 그 전에도 이미... 할 것 다 한다(?).

작년 하반기 중국은 물론 국내 중드 팬덤에서도 핫한 이유가 있다.


패도총재물의 좋은 예

'패도총재'란 언정소설(로맨스 소설 장르)의 주인공 유형을 부르는 말로, 

보통 영앤리치 톨앤핸섬에 능력까지 갖춘 완벽한 현대인이지만 그 대신 싸가지는 더럽게 없는 캐릭터를 일컫는 말이다. 언정소설이라는 장르 특성상 패도총재는 대부분 남성이고, 최소 재벌가 자제 혹은 대기업의 CEO, 본부장, 상무 등을 역임하고 있다. 한드에도 한때 자주 등장한 수많은 '본부장님'들과 비슷한 결의 츤데레 왕자님이라고 보면 되겠다.


<반시밀당반시상>도 전형적인 패도총재물이지만, 흔한 한드의 '본부장 드라마'라고 오해하지 말자.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여주 '강군' 캐릭터에 있다. 2020년의 드라마답게, 여주 캐릭터가 여느 한드의 여주들 못지 않게 똑부러진다. 남주의 방해(인듯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기 자리를 쟁취하고, 똘똘하게 자기 능력을 입증하며, 남주와 섭남에게 의존적이지도 않다. 여러모로 같은 2020년에 방영한 한국의 모 드라마 속 답답하고 무능하며 남성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여성 CEO 캐릭터와 굉장히 비교되는 행보. 


강군 역의 배우 백록. 똑부러지면서도 발랄한 연기가 찰떡

이처럼, 이 드라마의 참신함과 재미는 '백마 탄 왕자님' 클리셰를 뒤집는 데서 온다. 

보통 이런 장르에서 우리는 키다리 아저씨에 익숙하다. 재투성이 아가씨 여주를 지켜주고 성장시키고 신데렐라로 변신시켜주는 완벽한 능력남 말이다. 게다가 오피스 로맨스라니, 여주는 캔디 되시겠다. 직위는 대부분 계약직/말단 사원/비서일 테고, 능력은 있어봤자 빛을 못 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가짐만은 물론 당차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흔한 패도총재물이나 한드의 '본부장님, 상무님들과의 로맨스'와 달리, 

<반시밀당반시상>의 여주 '강군'은 오히려 남주가 방해한 자기 자리를 직접 따내고 업무에서도 전혀 의존적이지 않다. 일적인 실패나 부당한 결과에 있어서도 책임지고 감내하려는 당당한 여성이다.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당차기만 한 재투성이 아가씨가 아니라, 요정님 없이도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입을 수 있고 구두 때문에 발이 부르트도록 걷더라도 직접 파티장에 갈 줄 아는 멋진 여자 주인공인 것이다. 

당연히 신데렐라 스토리에 지친 대중은 그녀에게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제 대중이 원하는 여성은 더 이상 운 좋은 신데렐라가 아니라, 구두에 발을 구겨넣어서라도 욕망을 쟁취하려는 "신데렐라 언니"다.


그렇다고 패도총재물 특유의 '나만 챙겨주는 츤데레 능력남'의 설레임과 매력도 빠지지 않는다.

<반시밀당반시상>의 남주들, '원수'와 '두레이'는 '백마 탄 상무님'은 아니다. 단지 이미 능력도 노력도 충분한 여주에게 그저 작은 조언이나 도움을 '얹어'줄 뿐이다. 백마 타고 멋지게 등장하기보다는, 이미 말 한두 마리 정도는 있는 여주에게 더 좋은 백마나 적토마를 제공해주는 정도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여성 시청자는 충분히 설렌다. 애초에 시청자가 설레는 것은 도움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도움의 여부와 도움을 주는 대상에 달려 있다. 매력있는 남자가 꽃을 한 송이 주는 것과 열 송이 주는 것의 기쁨이 열 배 차이나지 않는 것처럼, 시청자가 설렘을 느끼는 데에는 남주가 여주를 '도와 준다'는 행위 자체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지 절대 엄청난 구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사실 참신한 드라마란 멀리 있지 않다. 익숙한 무언가 하나를 뒤집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움을 느낀다.

성별이던, 배경이던, 나이던 간에 딱 하나만 뒤집어도 그것에서부터 이야기 전체의 변화는 시작된다.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의 세 주인공들이 남자였다면? 이 드라마는 애초에 편성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남자 사원들이 겪는 고충은 기존 수많은 오피스 드라마들에서 봐왔기에 전혀 특별할 게 없으니까. 그렇지만 주체가 여성으로 변화하니 여태껏 다루지 않았던 여성 직장인의 문제, 고충, 이야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인턴의 나이를 바꾼 <꼰대인턴>, 직장의 배경을 바꾼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도 본질적으로 같은 결이다. 

익숙한 것의 사소한 변화가 가져온, 커다란 신선함이다.


당뇨 조심, 검은 화면 조심

이 드라마가 겨울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이유이자 최대 매력 포인트는 바로 짜릿한 로맨스다.

남녀 주인공의 관계성부터가 매력적이다. 

일단 남주 '원수' 캐릭터 설정이 독특한데, 

전형적인 츤데레 패도총재와 10년 동안 여주를 짝사랑한 순정남이 공존한다. 특히나 여주에게 못되게 구는 게 사실은 눈물 알레르기가 있는 여주가 울지 않도록, 울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지켜주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스토리라인도 설레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주한테만 직진하는 선명한 감정선도 매력 있다. 이름은 원수인데 절대 원수가 아니라는 점... 


특히 원수 역을 맡은 배우 라운희의 연기가 훌륭하다. 

매번 사랑에 실패하고, 오열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역할을 맡아왔고 그 역할들을 너무너무 잘 살렸기 때문에 오히려 능글능글한 패도총재 역할에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원수 역할을 정말 잘 살렸다. <반시밀당반시상>이 그의 필모 중 처음으로 사랑에 성공한(!) 작품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 

차기작인 <양언사의>에서의 역할도 패도총재지만 동시에 다리 장애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 능글맞은 왕자님과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까칠남을 모두 보여줄 것이 기대된다.


서브 남주 '두레이'도 마냥 해바라기는 아니고, 감정의 변화가 굉장히 입체적인 캐릭터다.

캐릭터를 조금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은 있지만, 세븐틴의 원우와 이준기를 닮은 배우 고한우의 비주얼로 납득시키는 느낌. 여러모로 제작진이 한드를 굉장히 많이 본 것 같은데, 메인과 섭남이 여주 앞에서 맞붙는 장면을 적재적소에 잘 넣으면서 삼각관계를 쫄깃하게 잘 살리는 게 웬만한 한드보다 낫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메인 러브라인을 잘 챙겨줘서 서브남주병도 덜하다. 

특히 1화는 구성이나 전개가 거의 16부작 한드의 1부 수준으로, 엔딩까지 찰지게 잘 뽑았다. 다만 '2년 후'로 넘어간 시점부터의 후반부 전개가 약간 나사 풀린 것마냥 힘 빠진 채 삐걱대는 것까지 한드스러운(?!)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 후술하겠지만, 30부작으로 만들었으면 완벽했을 뻔했는데.....


<반시밀당반시상> 20화 / 출처: 네이버 블로그 Small Indulgence 

다만 !! 20화, 21화는 이 드라마를 안 보더라도, 제발 무조건 시청을 권장한다.

<빈변불시해당홍>과 더불어, 2020년에 광총이 도대체 이 작품을 왜, 어떻게 통과시킨거지?가 궁금할 정도로, 키스신이... 미쳤다. 야외에서, 집무실에서, 복도에서, 사무실 바닥에서(!), 침대에서, 차에서, 파티장에서.... 거의 모든 장소에서 키스신이 나온다. 특히나 한 회차에 키스신만 무려 5번 나오는 대망의 21회는 러브라인 이어졌다고 탈주하는 시청자의 발목을 단단히 붙들기 위한 제작진의 신의 한 수가 분명. 누가 중드는 스킨십이 없다고 했는가!! 한드도 이 정도로 진하게, 자주 키스하면 시청자 게시판 난리 난다...

사실 이 두 회차 말고도, 본격적으로 러브라인이 전개되는 14회 이후부터는 남의 연애를 훔쳐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설레는 장면도 많고 스킨십도 잦다. 심지어 둘의 케미도 잘 맞아서 너무너무 달달하고 보기 좋다. 

시청 시 무조건 검은 화면을 조심해야 한다. 안 그랬다간 검은 화면에 비친 당신의 하얀 치아와 훤히 드러난 잇몸 그리고 헤벌쭉한 표정을 마주하게 될지니... 


굳이 아쉬운 점을 꼽아보자면 ...

1. 중간중간 뚝뚝 끊기는 개연성 (하지만 오피스보단 로맨스가 중요한 작품이니까 인정 가능)

2. 마지막 6부의 산으로 가는 전개

3. 무엇보다도 중드의 고질병, 조연파티가 심각

애초에 이 정도 전개 속도로 회당 45분 X 36부작을 만들기에는 이야기 자체의 크기가 큰 편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면, 그럼 이 작품은 왜 36부작이 되어야만 했을까?


사실 30부까지도 충분히 완결성이 있는 드라마다. 

그런데 여기에 굳이 쓸데없이 6부를 추가해서 이상한 전개를 낼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 애초에 이 작품의 재미는 메인 삼각관계이고, 서브 커플은 캐릭터도 서사도 딱히 재밌거나 신선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비주얼도 크게 매력적이지도 않다. 아마 이들의 분량을 줄이고 그 자리에 31부에 등장하는 2년 후의 이야기 정도만 짧게 짚어준 뒤 30부작으로 종영했더라면 ... 이미 이 작품은 한국에 저작권 잡혀서 지금 케이블 채널들에 매일같이 틀어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마지막 6부를 채우려고 서브남주 캐릭터를 산으로 보내버리고, 한 회차에서 서브 커플 분량만 절반이 넘는 기현상이 벌어지면서 드라마 전체의 퀄리티를 조금 떨어뜨린 점은 아쉬운 지점.



중드 현대극, 특히 도시극은 유독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도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반시밀당반시상> 또한 겨울 상하이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과 화려한 야경이 매 회차 등장해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욱 업그레이드한다. 코로나 끝나면 꼭 상하이에 가보고 싶을 정도.

한드도 이처럼 서울의 아름다운 명소들과 풍경을 많이 담아내는 작품이 많아지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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