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실패하는 중입니다.
29년을 살아오면서 이룬 것은 손가락만으로 충분히 꼽지만, 이루지 못한 것 -그러니까 실패라고 부르는 것- 을 줄 세우면 점심시간 급식실의 밥줄보다 길다면 길었지... 짧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이십 대의 마지막을 살고 있습니다. 이십 대 통째로 꿈꿔왔던 피자집을 올해 6월에서야 드디어 차렸습니다. 그리고 더뉴그레이(THE NEW GREY)라는 메이크오버 콘텐츠를 운영하는 회사에서는 직원으로 시작해 공동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럴싸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그렇게 보는 시선이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2019년 12월 31일까지 6년 동안 주 삼일 사일씩 밤새 클럽에서 바텐더를 했고, OBPC라는 피자집 문을 열기 전날까지 긴급 생활지원금으로 겨우(정말 겨우) 버텼습니다. 더뉴그레이가 굵직한 브랜드들과 협업해 번 돈은 바버샵을 차렸다 망하면서, 포마드와 슈트를 만들었다 망하면서 죄다 써버렸고 지금은 심지어 갚아야 할 빚도 있습니다.
아무튼, "실패"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이 조악한 글이 '작은 위로'라도 되길 바라면서...
나는 남들 다 아는 좋은 대학(한양대를 아직도 다니고 있다. 재학생이긴... 하니까)에 갔고, 더뉴그레이는 일 년 반 동안 뉴발란스, 진에어, 현대차 등등 끊임없이 클라이언트를 만났고, 연남동에서 가장 비싸다고 혀를 내두르는 자리에 꿈이었던 피자집을 차렸고,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의 아들로 태어났고, 엄마만큼 나를 사랑했던(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는) 사람과 사랑도 했다.
돌이켜보니 여기까지가 내가 이룬 것의 전부다. 그마저도 혼자였으면 못했을 것들, 그저 행운이었던 것들처럼... 내가 잘나서 이룬 건 하나가 없다.
수도 없이 실패했다. 나는 그저 같은 실패를 두 번, 세 번 반복하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헐떡거리며 살았다.
자 이제 정말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왜 살면서 가장 잘 친 시험인데, 실패했냐고? 대학을 못 갔으니까...)
10년 전(벌써..?) 나는 고3이었다. 0교시가 있고, 야자를 자정까지 시키는 학교에서 나는 언수외탐 합 100점이 안 되는 공부에는 취미 없는 학생이었다.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모의고사 전날엔 PC방에서 밤새 서든어택을 하고 OMR카드에 마킹도 하지 않은 채 부족한 잠을 채우던... 그런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수능을 잘 봐야 얼마나 잘 봤겠냐고..? 영어 빼고 죄다 1등급이었다(심지어 수학은 100점...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대학을 못 갔다. 후보 1번, 2번으로 다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주변에서는 재수를 권했지만, 당시의 나는 더 이상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질려버렸다. 학업이라는 그 지루하고 이유모를 노력에 대해.
그렇게 나는 열아홉 인생 최고로 뜨거웠다면 뜨거웠고, 지옥 같았던 1년을 화려하게 실패하고 고졸이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고졸이다. 아무튼 그 해 12월, 성인이 되기 직전에 나는 가방 하나 들고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울살이를 계속하고 있다.
여차저차 1년 반 동안 거의 400명의 아빠들을 만나면서 2억 정도를 벌었다. 거기서 나랑 코 파운더가 개인적으로 쓴 돈이 500만 원이 안되는데... 통장은 텅장이다. 여전히 '돈이야 또 벌면 되니까'라는 느긋한 마음이긴 하지만, 실패라면 제대로 된 실패였다.
바버샵을 차렸었다.
을지로에 하나 시청에 하나. 아빠들을 만나서 머리를 자르고, 옷을 입혀 드리려면 우리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을지로는 위워크에서 시작했지만 작년에 정리했고, 시청은 코로나 19 타격을 제대로 맞은 지난 5월에 정리하게 되었다. 바버 다섯을 떠나보내야 했다. 돈 잃은 건 괜찮은데(상대적으로 괜찮다는 소리다... 아프다), 책임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분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멈춰야 했다.
포마드도 만들었다.
와디즈에서 펀딩을 열었다. 1686%, 840만 원 펀딩을 성공했다. 500개 정도를 팔았던 것 같다. 거기까지였다. 4000개를 제작했으니 3500개의 재고를 떠안았다. 품고라는 물류 대행 서비스에 3500개를 맡겨놓고 매달 보관비를 내고 있었는데, 심지어 지난달 품고의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포마드는 다 어떻게 됐냐고? 먼지가 되어버렸다...
완벽한 실패였다. 더뉴그레이를 운영하기에도 버거웠다. 매일 새로운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하고, 그 클라이언트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도 벅찼으니까. 애써서 만들어 놓고, 팔 기 위한 노력을 할 여력이 없었다. 노력조차 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돌이켜보니 욕심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언가를 파는 건, 여전히 지금도 너무너무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또 만들고 있다.
실패한다, 또 실패한다, 계속 실패한다, 그리고 다시 실패한다. 더뉴그레이를 제외하곤 사실 죄다 실패했다. 아니, 더뉴그레이조차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적게는 다섯 번, 많게는 스무 번도 제안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첫 클라이언트 미니를 만나고, 이후부터는 '제안과 거절'의 과정이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 같다.
9살부터였다. 그때부터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 동생, 그리고 나, 우리 셋... 지금의 나보다 고작 한, 두 살 많았던 엄마는 혼자서 나와 동생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워야 했다.
우리가 셋이 되기 전 엄마는 나의 모든 순간에 내 옆에 존재했었는데, 그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해서(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엄마가 처음 내 곁을 떠나고(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나는 꽤 오랫동안 매일 저녁이면 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렸던 게 기억난다. 당시의 초조했던 기분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엄마는 스물넷에 나를 낳고부터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20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진서(동생)을 위해 살았다.
엄마로 살아 준 덕분에, 여자 사람 권나현은 없었다. 자기 삶을 기꺼이 포기하면서 인생의 절반을 나와 진서를 위해 살아온 엄마. 그게 사랑이었든, 책임감이었든 간에... 나는 지구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여자를 엄마로 만났다.
그런데 정작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엄마 곁을 떠났고, 10년 동안 아들 노릇 한 번을 제대로 못한 못난 자식이었다. 일 년에 전화하는 일이 다섯 번이 되지 않고, 제대로 된 용돈 한번 준 적 없고, 한 끼 식사를 함께하는 일도 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걸 나에게 쏟아 준 사람에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10년을 '조금만 기다려줘'라는 말만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직까지도, 다 알면서도 '엄마,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얘기한다.
"엄마 이제 정말 끝이야, 그러니까 정말 조금만 더 기다려줘"
누군가를 만나고, 설레고, 연애를 시작하고, 관계를 가지고, 때론 다투기도 하고, 때론 하늘의 구름조차 예뻤다가, 서로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가... 그러다가 때가 되면 언제나처럼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걸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감정 놀이라고 단언키로 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제법 긴 얘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내 관두기로 했다. 때때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외면해버리곤 한다. 아무튼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사랑이라고 하는 그 감정 놀이를 하지 않은 게(못 하는 걸지도) 벌써 삼 년이 되어간다. (스쳐간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당분간은 나는 계속 감정 놀이라는 프레임에서 나를 철저하게 배제시킬 것 같다.
두 번은 못하겠다, 라는 마음이 지배적이라서. 너무 진한 사랑을 해서? 무슨 대단한 상처라도 받아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그런 감정 놀이었고, 이제는 좋은 기억밖에 없다. 그런데도 두 번은 못하겠다. 아 정말 두 번은 못하겠다.
아무튼 저는 10년째 실패하는 중입니다. 앞으로도 수도 없이 실패하겠죠. 그러다 보니 '실패'라는 단어가 적어도 저라는 인간에게는 더 이상 나쁜 기분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요. 내비게이션에 갈 곳을 찍으면 나오는 이정표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과정 가운데 하나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오늘은 실패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