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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숲 May 11. 2019

삶이 켜켜이 쌓인 마을

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난 눈이 오는 날이 제일 좋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눈이 오면 학교가 쉬기 때문이다. 부산은 산복도로가 많고 구불구불한 도로가 많기 때문에 눈이 1cm만 쌓여도 곳곳의 도로가 통제되고 온 도시의 차량이 엉금엉금 기어 다니게 된다. 그러니 학교는 휴교령을 내릴 수밖에. 


그런 추억 탓인지 산기슭에 가파르게 난 도로를 오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눈이 오면 꼼짝달싹 못 하고 갇히겠구나, 하는 거였다. 게다가 오밀조밀 밀집되어 있는 집들은 옥상을 제외하면 볕이 잘 안 들 것 같고, 집과 집 사이에 좁고 가파르게 퍼진 골목길은 여행객이 자칫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인 미로처럼 보였다.





묘지 위에 만들어진 마을




마을이 이런 형태를 띠게 된 데에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본래 이 부근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토지를 징발해 공동묘지로 조성한 곳이었는데, 6·25 전쟁 이후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몰려와 부산역을 중심으로 피난촌을 만들자 좁은 지역에 밀집되는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이주를 시키게 되었고 그중 한 곳이 산기슭의 공동묘지였던 셈이다.


일본은 시신을 관에 넣어 땅에 묻은 후 봉분을 만드는 우리나라와 달리 화장문화가 보편적이었다. 화장터에서 시신을 태운 뒤 평평하게 고른 땅 밑에 유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비석을 얹어 주변에는 돌로 만든 울타리를 쌓았다. 즉, 건물을 세우는 데 필요한 토대와 기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본래 묘지였던 곳이라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똥오줌을 처리할 곳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물을 구할 곳이 없어 빨래는 물론이요 마실 물 구하기조차 귀했다. 말이 좋아 이주지, 산 사람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죽은 사람 자리에 욱여넣었다는 편이 더 적절했다.


당시 주민의 이야기에 의하면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가니 공무원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피난민들에게 주소가 적힌 종지 쪽지 한 장을 쥐어주며 그리로 가서 살라고 했다 한다. 그럼 보따리 하나 들고 달랑달랑 쪽지에 적힌 곳으로 가야 했다고. 


그리하여 가진 것 없이 묘지에 살라며 내몰린 피난민들은 비석 주변의 돌 울타리 위에 벽을 쌓고 지붕을 올려 집을 지었다. 겨우 한 몸 누일 수 있을 만한 자그마한 보금자리였다.


사진 출처: 최민식 갤러리


전쟁통에 고향을 떠나 힘들게 도착한 낯선 땅. 피난길에 헤어져 소식을 알 수 없는 가족. 부족한 생필품. 하루 먹고 살기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한 앞날.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빈손으로 묘지로 내쫓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피난민들은 살려고 했다.




그럼에도 살아간다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 금기시되는 한국에서 묘지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일본인들의 무덤이라고는 하나 죽은 이의 잠자리 위에 산 자의 이부자리를 깐 셈인 데다, 그런 의미에서 외부의 눈초리 역시 따가웠을 터다. 아무리 살려고 그랬다지만 그들이라고 마음이 편했을까. 그럼에도 그들은 열심히 삶을 꾸려나갔다.


마을 한편, 부산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최민식 갤러리에는 당시의 삶이 땀내와 살내음이 느껴지는 흑백사진으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쟁 때문에 하루 먹고살기가 힘들었던 시절,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진 출처: 최민식 갤러리




보다 살기 좋은 마을로




비록 부족하기만 하던 때라도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맹렬하게 삶의 불꽃을 태웠다.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고……자식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켰다. 평범한 우리네의 이야기다.


사진 출처: 최민식 갤러리


약 70년이 지난 지금도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세대가 바뀌고 사는 사람이 바뀔지언정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곳에 사는 주민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꾸려나가고 있다. 70년간 우리 모두 그랬다.


그러나 묘지 위에 세워진 판잣집이었던 마을의 모습은 처음과 많이 바뀌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벽에 흙을 바르기도 하고, 슬레이트를 얹어서 지붕을 만들기도 하고, 2층을 올리기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벽을 보강하고, 외벽에 깔끔하게 페인트까지 칠해진 지금은 토대가 묘지라고 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범한 마을이다.


물이 귀했던 동네에 수도가 들어오고, 빨래방이 생기고, 좁은 골목길만 있던 곳에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생기고, 버스가 운행된다. 허름했던 건물 외관은 예쁜 페인트가 칠해지고, 동네 사랑방이 생기고, 방범용 거울이 설치되고, 공영 주차장이 생기고, 몇 년 전부터는 일부 지역에 도시가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트나 시장에 가긴 불편하지만 대신 슈퍼마켓과 청과물 가게가 있으며, 미용실도 있고 동네 주민들의 모임 장소가 되어주는 카페도 있다.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여 수익은 마을을 위해 쓰는 가게다.


말끔한 가정집
집주인의 인테리어 감각이 돋보이는 집
골목길 입구에 세워진 마을버스 정류소
이 동네에는 부동산 사무소 대신 전·월세 게시판이 있다


물론 아직도 시설은 부족하다. 태생적 이유로 벽이 맞닿은 채 지어진 집들은 뜯어고치기도 여의치 않고, 주차 공간이 부족해 옥상에 차를 주차하는 집도 있으며, 수도가 들어와도 물을 쓸 공간이 마땅치 않은 곳도 많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삶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다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집을 깨끗이 정돈하고, 작은 화단을 가꾸고, 마을을 꾸미고, 하루하루 소중한 일상을 반복한다. 우리 모두가 그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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