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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Sep 25. 2023

현대 야사(野史)

(3) 변명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2023)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로서의 그가 선점하고 있는 비옥한 영토를 바라본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보다 한 세대 먼저 태어난 무라카미 하루키. 확실히 나의 부모님 세대는 무엇도 하기 어려웠고 무엇이나 될 수 있었던 세대였다. 반면 나의 아이들 세대는 무언가 하기 쉽고  무엇이 되긴 힘든 세대이다. 나는 부모님 세대와 아이들 세대의 중간 어디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향유하며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 되어가고 있(겠)다.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나고 죽는다. 살아 있는 동안 같은 상황을 맞이해도 빚어내는 법이 다르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기억한다. 모두 다른 가운데 부류가 있다. 미묘하게 다르며 미묘하게 같은 그런 부류. 동시대의 작가나 번역가 중 나와 같은 사고를 하는 이가 있고, 또한 문체가 같은 경우도 더러 있다.


이런, 저런 글을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자신이 써 둔 글을 다시 읽은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필요에 의해 되읽다보면 그 기록이 새삼 무척 생경하다는 것을, 마치 내 손을 빌어 '누군가' 적어놓은 듯 말이다. 하루키는 이동하는 택시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이의 글'을 듣고 “누구의 글인가?”라며 궁금해했었다 한다. 누구의 글이었을까? 알고 보니 자신의 글이었다. 하루키가 문득 누가 쓴 글인지 궁금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 너무나 익숙해서였거나, 혹은 생소하지만 마음에 들어서였겠지.


그런가 하면 타인의 글을 읽으며 내 글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곧바로 작가나 번역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억해 둔다. 그런 작품의 경우 마지막 마침표까지 편안하게 읽을 수 있고, 곧바로 다시 한번 읽을 때도 있다.


나는 무언가를 글로 표현할 때 적시하는 것보다 그 안의 심상을 늘어놓는 방식을 취한다. 당신이 나를 읽게 된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1km'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예 다른 영토에 도달한 채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좋다. 각자가 모두 다르게 알아채는 그 지점, 모두 어쩌다 다른 곳에 착지하는 민들레 홀씨 같은 상황.


하루키 역시 그는 힘을 뺀 채 누군가가 어딘가 도달하게 만드는 글을 쓴다. 무엇도 강요하지 않은 채, 상세한 듯 보이지만 빈 구석이 많은 지도를 제시한다. 나는 그가 내게 들려준 지도를 들고 30년간 여행 중이다. 그는 언제나 나를 기대하게 만들었고 또한 지치게 했으며 보살피지 않았다. 저만큼 떨어진 섬에서 나를 바라보며 세상 편안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나는 대개 육체의 건강과는 동떨어진 상황에서 책을 읽고, 사색하고, 한없이 차분한 가운데 마음에 글이 될 알갱이를 모은다. 알갱이가 여문 후 참깨를 털듯 글을 써낸다.

(말이 나온 김에 참깨이야기. 참깨는 들깨와 달리 잎이 새초롬하니 길쭉하다. 흔히 먹는 향긋한 깻잎은 들깻잎이다. 들깨는 엉성하니 외부로 도드라지게 씨앗을 물고 있고 참깨는 단단한 껍질에 확실히 숨긴 채 알맹이를 키운다. 다 자란 참깨의 밑동을 베어 벼를 말리듯 묶어 세워 말린다. 잘 마른 깻대는 멍석을 펴고 몽둥이로 톡톡 두드려 털어낸다. 다 털어낸 깨와 잡티는 키에 담아 바람을 향해 서서 어깨 만치에서 쏟아내면 말라 부서진 잎과 줄기가 호로록 날아가고 깨알은 정리된 바닥에 그대로 떨어진다. 이름하여 참깨 정선. 깨를 털어내느라 한껏 두드려 맞은 깻대는 군불 땔 때 불쏘시개로 쓰면 기가 막히다. 뜬금없는 참깨 이야기 미안합니다.)

청탁을 받고 기한이 있는 글을 써본 적이 없으므로 쫓기듯 쓰는 글이 어떤 맛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루키 역시 기한이 있는 글을 쓰지 않지만 그는 직업적인 글쓰기를 하므로 역시 나의 글쓰기와는 맛이 다르겠지? 어쨌든 나는 나의 맛이 나는 글을 쓴다. 쓰는 것에 변명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애초에 변명할 마음이 없으므로 누군가 왜 쓰냐는 질문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세상은 변명할 마음이 없는 이에게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임에도 남의 의견이나 질문이 신경 쓰인다면 스스로 분명한 변명거리를 찾았거나 찾고 있을 가능성이 짙다.


하루키의 신간이 올해 4월에 본국에서 발간된 후, 생각보다 긴 시간을 들여 9월에 국내 초판 1쇄가 나왔다. 본국에서는 검은색 바탕에 <街とその不確かな壁(거리와 그 불확실한 벽)>이란 제목으로, 국내에는 초록바탕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란 제목으로 선보였다.


... 그리고 나와 그림자는 단단한 벽돌로 이뤄져 있을 두꺼운 벽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통과했다. 마치 부드러운 젤리층을 헤치고 나아가는 거처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축이었다. 그 층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무언가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시간도 거리도 없고, 고르지 못한 알갱이가 섞인 듯 독특한 저항감이 느껴질 뿐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물컹거리는 장해물을 돌파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207페이지 중에서


국내에 발간된 신간의 표지에는 위 본문의 문장을 시각화한 듯한 일러스트가 앉혀있다. 달을 닮기도 했고, 그림자가 드리워진 뚫린 벽 같기도 하다.


나는 확실히 하루키의 편이긴 하지만 이번 장편소설을 읽으며 조금 민망한 부분이 감지됐다. 1Q84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체적인 묘사를 위해 방편으로 삼은 통속적, 관용적 표현이 순진하게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10대 소녀와 소년의 대화체는 70대의 하루키가 구현하기 어려운 것일까? 어렵겠지?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다. 그는 은유보다 ~같이, ~처럼의 직유법을 선택했고, '호수'라든가 그 속의 '용'이라든가 '흔한' 장치를 심어두었다. 조금만 더 생경한,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아주 소소하고 작은, 매우 작은 바람.


올해 장편소설의 하루키는 확실히 친절해졌다. 과거, 자신의 글에 해설서를 써 내보일 만큼 보는 대로 달라 보이는 추상화 같은 분위기를 벗고 다르게 이해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뉘앙스다. 나는 언제나 하루키를 지지하지만 다른 대륙 어딘가에 '마음대로' 안착할 수 없도록 한 친절함이 무척 답답하다. 한여름에 터틀넥 티셔츠를 입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결같은 맑음의 언어로 나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아무리 아껴 읽으려 해도 어느새, 어느새 새로운 챕터로 바뀌어 간다.


상실감을 두고 일생을 바쳐 글을 쓰고 있는 하루키. 하루키의 상실은 상실 끝에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는다. 변명을 하지 않으므로, 왜 그랬냐, 물을 수가 없다.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감은 단편적이며 평면적이어서 오히려 절절하게도 마음 한편에 담긴다.


살아가며 매 순간 인지하는 모든 것에서 이유를 묻고, 들으며, 유추하고, 간주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변명이 얹어지고 그 변명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다 일까? 까닭과 사리를 가려내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러므로 인해 오히려 진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삶이다. 하루키의 장편들은 그렇게 입을 꾹 다문채 유유히 나의 편견으로부터 도망친다.


누군가에게 변명을 해야 한다면 입을 닫고 있을 일이다. 설명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흔하다 싶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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