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경 Nov 08. 2023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9)

술 한잔?

나에게는 돌을 던져 쫓아도 포기를 모르고 따르는 개와 같은 통증이 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이 어디 통증뿐 일까? 사념이란 놈은 아무리 사로잡아 때려눕혀도 좀처럼 멸하지 않는다. 자동화 설비를 갖춘 사유의 시스템은 수고롭게 눌러 줘야 하는 작동 버튼이 없고 그것에 필요한 원자재 역시 요구되지 않으므로 절로 생산되어 많은 인연을 만든 후 자연 소멸한다.

눈을 뜬 것과 감은 것, 깨었거나 잠들었거나 하는 그 모든 상황에도 사유의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한다. 곤히 잠들었을 때 통증이 일어나면, 나와는 별개인 채로 잠들지 않고 깨어있던 ‘의식’이 사용설명서에 명시된 사항을 수행하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깨운다.

깨어난 나는 납덩이같은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고 약을 삼키거나 파스를 붙인 후 유령처럼 걸어가 어둠 속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 통증은 정한 때나 장소도 없이 나타나고, 뒤를 이어 자동화 설비로 양산된 온갖 생각들이 통증으로 멈추어선 몸에 컨베이어 벨트를 감은 후 웽웽 소리 내며 막힘없이 흐른다. 그야말로 사유의 완전 자동화 시스템!


통증과 짝지어져 있는 ‘상념’은 때로 폭신하고 혹은 따갑다. 손 시리게 가엾고 배고프게 절대적이다. 내 생각을 저항 없이 지켜본다. 맨 정신으로 맨 정신을 바라보는 것, 저항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하는 일은 무척 지루하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속이 울렁거린다.

통증과 생각 더미에 묶여 한심해진 순간 어떤 식으로 유의미한 것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한심해진 나의 의식 더미 중 한줄기가 집요하게 유의미한 것에 대해 갈망한다. 이런 때, 멍하니 있지 않고 스윙 댄스를 추거나, 피아노 연주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혹은 에어팟을 꽂고 산책을 한다면? 애인의 손을 잡고 그의 손바닥을 꼬집으며 놀거나 그의 귓불을 간질이며 드라이브를 한다면? 세 살 터울 두 사내아이와 말 잇기 놀이를 한다면? 이 순간 그 모든 것을 제한 없이 뒤섞어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욱신거리며 뜨겁게 부어오른 환부가 내 신체 전부의 감각을 잠식하고 몸을 고정한 채 눈동자만 움직이며 시선을 훼훼 휘두른다. 등대가 밤바다를 비추듯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잠이 와서 통증이 덜한 것인지 통증이 덜해 잠이 오는 것인지, 단내 나는 새벽 네 시의 졸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짧고 깊은 수면 후 알람을 듣고 엷게 드리운 통증을 느끼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눈꺼풀 속에 모래가 잔뜩 낀 듯 까끌하다. 대개의 일상은 이렇게 시작되며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세세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고, 기억나지 않는 사무실의 과업을 마친 후 퇴근길 술 약속은 적잖은 들뜸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 나는 사람을 좋아해. 좋아하는 사람과의 술은 말해 무엇해? 술은 사유의 자동화 시스템 ‘잠시 멈춤’ 버튼이다. Stop이 아닌, Pause. 홀로 재충전할 때의 멈춤(Stop)과 술자리의 잠시 멈춤(Pause)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술자리의 ‘잠시 멈춤’은 그 끝에 사념의 양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 홀로 시간을 들여 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멈춤’은 그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내가 서로 달라지는, 사념의 노선 변경을 의미한다. 잠시 멈춤은 호흡 고르기의 기능이 있기에 ‘아무나’ 함께 마실 수 없다. 나의 술은 집 밖에서 특정 사람과 함께 마신다. 나에게 술이 가진 의미는 술 자체가 아니므로 여간해서는 집에서 마시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술을 곁들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지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술은, 그것에 의한 취기는 사람의 감정과 표정을 풍부하게 만든다. 거르지 않고 표현하게 만드는 묘약이다. 상대가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이유’로 본의를 가리려 애쓰는 모습을 실망스럽게 지켜보지 않아도 되므로 술이 좋다. 조작되지 않은 동공 크기의 변화와 입 주변 근육의 들썩임, 웃을 때 활짝 열리는 입술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치아, 충분히 뒤로 젖혀져 더욱 선명해지는 목빗근, 점점 테이블로 가까워지는 상체, 주어와 서술어가 어긋나면서 갈 길을 잃어 점점 본론에서 멀어지다 용케도 본론으로 회귀하는 만연체의 언어들, 취기에 의해 따스하게 데워진 두 손과 볼, 그 모든 것이 술잔이 놓인 테이블만의 향연이다. 당신이 취기에 의해 이성이 마비되어 마주한 내가 향기롭게 느껴진다 생각하는가? 아니다. 틀렸다. 취기가 도는 인간은 일정한 구간에 이르면 모두 향기로워진다. 취기의 향기로운 매력은 잔을 삼킬수록 점점 고조되고 그러다 마침내 이른 봄 목련처럼 추한 모습으로 만취되어 시든다. 익숙하고 다정한 이와 함께 마시는 술은 서로의 향기를 감지하니 기쁘고 과음의 나락을 경계하므로 그 마무리 또한 여여하다. 이 세상 모든 술자리가 정제되어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때때로 터프해지기도 하고 선을 넘어 추해지기도 하니 술이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성 중 가장 요물이다.     


내가 복용하는 약의 종류와 용량, 등급을 생각할 때 음주에 관한 주의력이 필요할까?

나의 병증을 관리하는 주치의의 경우 금(절)주 하려고 스트레스받는 것이 ‘적당히’ 마시는 것보다 해롭다며, 무엇을 더 챙겨 먹으려 하거나 무엇인가 덜 먹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충고했다. 덧붙여 평상시 대로 먹고 근력 운동을 하고 질이 좋은 수면을 당부했을 뿐이다. 이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류머티즘이 어떤 원인에 의해 발현되고 어떤 원인에 의해 소멸하는지 밝혀진 바가 없기에 그렇다 했다. ‘막연히’ 스트레스가 만병의 기원이며 담배는 백해무익하므로 스트레스로부터 마음을 관리하고 금연하라, 정도로만 주의를 준다.

정기적으로 통원하며 기본 검사를 받고, 그보다 긴 주기로 복부의 장기 상태를 점검한다. 지금까지 술에 의한 권고나 주의사항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이유로 술을 마셔서 류머티즘의 양상이 어떻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이에 생애 전반에 걸쳐 즐기던 모든 것을 그대로 온전히 유지한다. 통증이 찾아오면 잠시 웅크려 지나가길 기다릴 뿐, 그뿐이다. 어째서 류머티즘이 내게 발병했는지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어쩌다 보니 저만큼 물러났다 싶다가도 바짝 다가와 오래 머물기도 하므로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는 갯바위처럼 우뚝 서서 견디며 겪는다.

    

매 순간 피었다 지는 감정과 결코 강제할 수 없는 인연은 차라리 그러므로 인해 자유롭고 새롭다. 우리는 술자리에서 각자의 인생을 말하고 공유한다. 비슷할 순 있으나 어떤 서사도 같지 않다. 이야기의 끝에 ‘좀 더 진솔하게 그 속에 담겨 살아볼 것’을 다짐하거나 곁에서 응원하며 술잔을 들이켠다. 잘 살 것 없어, 그냥 살어, 그냥. 죽을 때까지 그냥 살자, 우리. 알았지?

매거진의 이전글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