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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경 Dec 07. 2023

귀신의 시간에 난 거실에 앉아 있었지 (10)

복잡한 유형의 인간

모든 확신은 착각이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사라질 일이 사라질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포함된 모든 서사에서 자신의 노력이나 소망이 소용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삶에 연루되는 변수가 마른날 먼지처럼 많다는 뜻이다. 유튜브로 만나는 법상 스님(法相, 대원정사 주지)의 법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노력한다. 하지만 결과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를 충실히 진심으로 산다, 그뿐이다.'

나와 당신, 혹은 수많은 인연의 비벼짐으로 올이 묶이거나 풀린다. 100% 순수한 나의 의지로 성사된 듯 보이는 많은 일이 그것만으로 해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또한 몸을 낮추어 피하려 애쓴다 해도 '결단코'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생길 일은 생겨나고 소멸할 일은 소멸한다. 그것이 삶과 죽음, 합격과 불합격, 사랑과 이별, 행복과 불행 그 어떤 것이든 모두 그렇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리, 저리 뒤척이며 여태 살아왔다.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끝없이 휘날리는 '나'와 끝없이 제자리로 끌어다 놓는 '또 다른 나'가 있다는 정도다. '나'라는 놈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애가 타고, 뜨거우며 속단함으로 직관한다. '나'는 미온적 태도와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속내는 전혀 말랑하지 않다. 깐깐하며 경계가 선명하고 신속한 결정 끝에 마무리마저 잔혹할 만치 확실한 편이다. 물론 매사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여지를 두지 않는가 하면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와 어느 시절에는 한없이 자비롭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나'에 비해 '또 다른 나'는 모든 것에서 초월해 있으며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조차 초월적이다. '또 다른 나'는 선입견이나 욕심, 바람이나 실망 따위를 느끼지 않는, 채워짐 없이 가득 차 있는 존재다. '나'는 '또 다른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눈에 들려 노력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또 다른 나'에 의해 정화되고 안정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또 다른 나'는 '나'라는 놈이 입었던 옷을 벗겨 깨끗이 세탁하여 햇빛에 말린 후 다림질을 하고 정갈히 입혀주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다만,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으며 무엇이 어떻다 가르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담담히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뿐이다. '나'란 녀석은 잠자코 '또 따른 나'의 부름을 받아들이며, 그에 의한 '세탁 작업 과정'을 통과한 후에 '정상 작동'의 의지를 갖는다. '나'는 시시때때로 뜨거워짐과 차가워짐을 반복하면서, '또 다른 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중간의 한 지점을 의식한다.     


진정 못 견디겠다 싶은 구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구간은 있다고 굳이 일반화하지 않더라고 이미 누구에게나 그런 구간은 있다. 그런 구간을 지날 때는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를 자주 의식한다. 오히려 '나'에서 '또 다른 나'에게로 무게 중심을 옮겨 두고 '나'의 펄떡임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살고 싶구나, 나는 지금의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살고 있구나. 나를 접기에는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한 삶이다. 그래서 나는 펄떡이며 절망에 잠기지 않고 묶이지 않는구나.


있는 그대로 자신을 지켜보는 일은 민망하고 낯간지러우며 너무나 절절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를 지켜보면서, 지켜보는 내가 나를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고 그 무엇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지켜본 바로의 나는 스스로 예상할 수 없었고, 강제하지 못했으며, 철저히 편을 들어 줄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어디론가, 저만큼 이동해 있었다.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식의 이동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포함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양립하거나 합쳐졌다.     


매 순간 따라붙는 통증은 어떤가! 통증 속의 삶은 매우 극적이다. 마치 일식과 월식이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낮과 밤의 하늘처럼 신비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통증이 야기하는 활동력의 제한과 근육의 강직, 그에 의한 미묘한 신체의 뒤틀림을 담담히 받아들이긴 어렵다. 몇 초 후 걸을 수가 없거나, 갑자기 주먹을 쥘 수 없게 되며, 간혹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피할 사이도 없이 내리는 대광장 한가운데 한여름 낮의 비처럼.


곁에 함께 있던 동료나 가족들은 지켜보며 난처해하는 눈치다. 이해가 안 되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통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언제 날아들 것인지 나조차 전혀 모르므로 당신을 이해시킬 수가 없다.

평일 어느 날 아침, 몸을 천천히 움직여 출근 준비를 마친 후 신발을 신으려 하니 갑자기 신의 계시처럼 발을 신에 넣을 수도 없이 통증이 온다. 안타깝지만 사무실에 전화해 연가를 낸 후 한 발로 까치발을 뛰어 침실에 돌아가 무기력하게 눕는다. 병증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니 순응하지 않으면 더 큰 칼로 힘껏 내 목을 겨눌 것이다. 이런 식의 상황은 매일, 하루 중 익숙하게 반복된다. 타인에게 표가 나거나 혹은 표가 나지 않거나 일뿐, 통증이 없는 날은 없다.


내가 나를 동정하지 않음으로 그것으로 됐다. 내가 어떤 상태이건 '또 다른 나'는 잠들지 않은 채 나를 지켜보고만 있다. 그 무엇도, 무엇도, 무엇도, 관여하지 않으므로 어리광 따윈 통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모든 것이 신통치 못한 것만은 아니다. 삶의 주름을 펼쳐 내어 그 공간에 '무척 인간적인 나'를 위한 활동을 채우고 있다.


누군가에게 읽힐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공감이 될 피드를 올리고, 누군가는 나도 그릴 수 있겠다 싶은 그림

을 그려 선보인다. 이 세 가지 활동은 기다렸다는 듯 어느 순간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손잡이가 보였고, 자연스럽게 손잡이를 돌리니 문이 열렸고, 그렇게 수월하게 새로운 공간에 포함되었다. 이전의 삶에서 미루거나 무시했던 자잘한 소망들이 씨앗 상태로 땅에 묻혀있다 발아한 느낌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과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정작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모두 저절로 제 시절에 온다고 깨닫는 순간 나는 또 기존의 지점에서 약간 이동한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특별히 기뻐하지도 안도하지도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또 다른 나'라는 '너'는 정녕 존재하는 것이냐,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나의 편이냐, 그 누구의 편이냐, 아니면 그 누구의 편도 아닌 것이냐! 가끔 내가 나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어찌 됐든 나는 '나'와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인정하며 인지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유형의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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