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일상의 자잘한 슬픔
그녀가 나와 함께 근무하던 곳에서 전보 명령으로 타지에 가게 되었다. 그간 쌓은 정이 깊어 구성원을 달리하며 잦게 술자리를 마련해 헤어지는 섭섭함을 풀어냈다. 마지막 공식 모임을 마치고 헤어지기 직전, 따로 선물을 마련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취기와 함께 오르기에 백을 열어 손을 뒤적여 보니 작은 방울이 달린 합죽선이 잡힌다. 이 부채는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얻는 부채인데 신윤복의 미인도가 프린트되어있고 4~5년간 여름마다 내 손에 익어 반질반질해진 물건이다. 아직은 덜 여문 여름이지만 머지않아 나는 이것으로 해를 가리거나 데워진 목덜미를 향해 부채질을 해댈 것이다. 만지면 기분 좋게 맨질한 그것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언니, 그건 누가 봐도 언니 물건이지 내 것이 아니야. 알잖아, 됐어."
그렇지. 내게 유용하다 하여 너에게도 그렇진 않을 거야. 머쓱해하며 그냥 백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 후 여름이 한창일 때 그녀는 고요히 방울소리를 내며 이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을 때 그녀는 한결같이 내 마음을 제 목에 두르고 싶어 했다. 이 표현이 좀 그렇다 싶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제 편이 되어주길 원했고, 한번 더 들여다 봐 주길 원했고,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럴 것도 없는데 나는 왜 그렇게 그녀에게 박했을까 생각해 본다. 사랑해, 예쁘다, 잘했어, 너는 다르다, 너뿐이야 이런 말을 참 아꼈다. 해줄 수도 있었지만, 대개 하지 않았다. 이유는 없다. 나는 녀석을 좋아했고 녀석 또한 나를 좋아했다. 좋아하다 보니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았다. 녀석이 떠난 인간계에 남겨진 채로 여름의 한가운데와 가을, 이후 겨울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빈소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후, 49제가 있은 다음 날 그녀가 안치되어 있는 추모관에 들렀다. 조용하고 작은 암자의 추모관이었다. 커다란 불상이 한가운데 위치하고 세 개의 벽면을 채워 안치단을 쌓았다. 오른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 휘 둘러본다. 듬성듬성 비어 있거나 가득 차 있는 안치단에서 그녀의 이름과 사진을 찾는다. 들어선 곳에서 안쪽 벽까지 이동하며 대강 훑어보다 다시 출입문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 나와 보니 동쪽 벽 약간 아래쪽에 그녀가 안치되어 있다.
"여깄다."
내가 조용히 숨 쉬듯 말하자 함께 간 동료 둘이 내 곁으로 모인다. 한 동료가 준비한 꽃다발을 안치단에 붙여주려다 그녀의 사진을 가리게 되자 잠자코 아래 바닥에 내려놓는다. 누구 하나 울지 않고 그저 조용히 서있다. 열린 문으로 파고드는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고.
"언니!"
"알지, 언니!"
"나 잘했지!"
"나뿐이지?"
그녀의 맑고 또렷한 음성이 귓전에 울린다. 응, 알고 말고, 알고 말고. 잘했지, 잘했고 말고. 갑자기 울 것 같은 기분. 지금은 울고 싶지 않아.
코끝이 시큰 거려 추모관을 나와 대웅전으로 간다. 부처님 앞에 삼배. 간절한 마음이지만,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순백의 삼배다. 망자와 산 자를 위한 바람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떻게 빌어야 하는지 막연하다. 그러므로 간절함을 가득 담아 바닥에 엎드려 두 빈 손을 하늘을 향해 뒤집어 귀옆까지 들어 올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망자가 된 후 첫 생일이 되었다. 그녀의 생일날 저녁, 추모관에 함께 갔던 동료를 막걸리 집에 불러냈다. 사람은 셋이지만 잔은 네 개를 청해 빈자리에 녀석의 몫으로 막걸리 잔과 젓가락을 놓아두었다. 셋이 돌아가며 녀석의 잔을 채웠다 마시고, 다시 채웠다 마신다.
울적하지도 않고 서럽지도 않고 슬프거나 한 기분도 아니다. 출입구 문에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때 이른 서늘한 가을바람이 발 밑으로 스민다. 갑자기 머리칼을 흩는 바람이 훅하고 지나간다. 우리 넷 중, 셋은 살아 있는 이 세상과 살아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여느 때처럼, 녀석이 살아 함께 있을 때처럼 서로 엮어가던 이야기의 뜨개질을 이어간다. 이야기의 코에 바늘을 꽂고 실을 세 번 감아 맵시 있게 빼뜬다. 이야기 뜨개질은 그렇게 심야까지 이어진다. 다 마신 막걸리 병이 여섯 개. 취기 없는 채로 막걸리 집에서 나와 흩어져 집에 돌아갔다.
남도 사람에게 제주는 특별한 섬이며 마음으로 가까운 섬이다. 가족이 제주에 거주는 하는 경우가 흔하고 그들이 뭍으로의 목포를 자주 찾았던 것처럼 우리가 섬으로의 제주를 자주 찾는다. 목포에도 바다가 있는데 왜 제주의 바다 앞에 넋을 놓고 서 있느냐며 농을 하는 사이다.
녀석과 나는 제주에 함께 왔었다. 나와 녀석, 그리고 동료 한 명. 온 첫날 동문시장 야시장에서 안주거리를 샀다. 갑각류를 좋아는 녀석이 딱새우회를 한팩 산다면서 네, 다섯 군데를 돌며 개수와 크기와 가격을 물어보았다. 발품을 팔며 꼼꼼히 따져보는 번거로움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날은 별로 불평하지 않고 부지런히 녀석을 따라다녔다. 열정적으로 개수를 세어 보았고, 판매하는 곳마다의 가격을 대신 기억해주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밤 동문시장 야시장에서 가장 실하고 싱싱하며 가격은 제일 싼 딱새우회를 샀고, 호텔에서 소주와 함께 먹었다. 동문시장에서 구매한 안주거리는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있었으나 오직 녀석의 딱새우회만 정확히 기억에 남았다.
얼마 전 워크숍으로 제주를 찾았다. 제주 공항을 나와 렌트한 차량을 인수하러 이동하며 나는 또 망자가 된 녀석의 뒤꿈치를 보았다. 작은 키에 단단한 상체, 편한 신을 신고 가볍게 걷는 에너자이저. 나 같은 유형의 인간 열명을 모아 놓은 듯한 활기를 지닌 녀석. 워크숍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녀석은 나와 함께였다.
참 적응 안 되는 삶이지만 잘도 이어가는 삶이다. 모르는 게 많지만 안다 해도 별다르지 않다. 겪을 일은 겪어야 하고 잃을 것은 잃어야 하니 말이다. 죽음을 특별히 바라볼 수 없도록 잊을만하면 한 번씩 산채로 남겨진다. 거듭 남겨질수록 그마저도 그대로 의미가 있으니 담담히 잘 살 것도 같은데 아무래도 '담담히'는 그른 모양이다.
어느 퇴근길 녀석과 비슷한 체구, 옷차림의 뒷모습이라도 만나면 깜짝 놀라며 반갑다가 아, 너는 이제 없지, 하는 수 없이 체념하듯 슬퍼진다. 목포의 서쪽, 지는 해가 붓질한 붉은 하늘의 무늬가 눈물에 이글거린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깊고 진한 붉은색 슬픔이 내 머리끝에서 명치를 지나 발바닥을 타고 대지에 흘러내린다. 괜찮은 가운데 예리하게 잘 갈아둔 기억의 칼날이 순간 마음을 베고 유유히 사라져 일상의 자잘한 슬픔들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채로 섞여든다.
그렇다, 녀석은 후회나 아쉬움, 미움이나 원망이 물러서는 그곳으로 고요히 방울소리를 내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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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는 이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