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읽히지 않는 구조

- 의미가 되기 전의 배치

by 서히

작업을 하다 보면 가끔 화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선도 있고 색도 있으며, 분명 무언가가 놓여 있는데

그것들이 아직 하나의 ‘말’이 되지 못한 상태.

무엇을 그리고 있느냐는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을 때다.


나는 이런 화면을 마주할 때 구조가 결여되었다기보다,

아직 읽히지 않고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구조는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지금의 시선으로는 아직 그 결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는 상태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종종 구조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만 국한해 생각한다.
논리가 선명히 드러나고, 설명이 가능하며,

단번에 읽히는 배치만을 구조라 믿는다.

하지만 작업을 하며 나는 구조가 언제나 그렇게 즉각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떤 구조는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화면 앞에 오래 머물수록 나는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이 선이 옳은지, 이 색이 적절한지,

지금의 배치가 실패인지 아닌지를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는다.

읽히지 않는 구조 앞에서 성급한 해석을 내리는 일은,

오히려 구조가 스스로를 드러낼 통로를 닫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더없이 자유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도 고정되지 않았기에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고,

설명되지 않았기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능성의 자리다.

작업실에서 이런 상태는 흔히 ‘애매한 화면’이라 불린다.
완성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그 모호한 중간의 상태.

하지만 나는 점점 이 애매함이야말로

작업에서 가장 밀도 높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구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구조는 바로 이 모호함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정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히지 않는 구조는 나에게 기다림을 요구한다.

더 그리기보다 더 오래 바라볼 것.
설명하려 애쓰기보다 배치된 것들 사이의 간격과 긴장을 느껴볼 것.


오늘의 화면도 아직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절된 침묵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언어에 가깝다.
나는 그 구조가 스스로 읽힐 준비가 될 때까지,

오늘도 기꺼이 이 앞에 머문다.

아직 읽히지 않는 구조.
지금의 나는 그 앞에서 서두르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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