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말하는 언어에 대하여

효용의 언어를 넘어, 감수성의 언어로

by 서히

예술의 언어가 숨 막히는 순간

요즘 들어 ‘문화예술교육’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예술가, 기획자, 교육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을 이야기한다.


그 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술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놓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언어들이 종종 숨 막히게 느껴진다.
단어 하나하나는 옳지만,
그 속에서 예술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쓸모의 언어로 쓰인 예술

문화예술교육의 담론은 대부분 ‘쓸모’의 언어로 쓰여 있다.
예술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시민성을 함양하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말해진다.


정책 문서나 교육 보고서에는 늘 비슷한 문장이 반복된다.

"문화예술교육은 문화적 시민성을 함양하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며,
지역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한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문장이다.
그러나 읽고 나면 묘하게 공기가 무거워진다.
예술이 인간의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감각이 아니라,
사회적 효용의 증명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치로 환원되는 예술

‘얼마나 많은 인원이 참여했는가’,
‘얼마나 큰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는가’,
‘얼마나 빠르게 성과가 나타났는가.’

이런 언어들은 예술의 본질을 수치화한다.
그 과정에서 감수성은 ‘보조 개념’으로 밀려나고,
예술은 평가 가능한 도구로 전락한다.

하지만 예술은 애초에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 이전의 감각,
세상을 느끼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감수성의 언어

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감수성의 언어란 무엇일까.

그것은 논리보다 느낌으로 말하는 언어,
가르침보다 함께 머무는 태도,
정답보다 머뭇거림을 허락하는 감각이다.

감수성의 언어는 느리다.
정책의 언어가 결과를 향한다면,
감수성의 언어는 관계와 변화의 기미를 향한다.
그 안에서 ‘배움’은 전달이 아니라 "공명(共鳴)"이 된다.


느림 속에서 자라는 감각

아이들이 물감을 섞다 우연히 만들어낸 새로운 색을 보고
“잘했어.”라고 말하는 대신
“그 색은 어떤 느낌이 들어?”라고 묻는 순간.

그건 이미 감수성의 언어로 전환된 교육의 장면이다.
정답을 주는 대신,
느낌과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는 일.
그 안에서 아이는 기술이 아니라 감각으로 세계를 배운다.

문화예술교육의 본질은 바로 그 여백 속에 있다.


불완전함 속의 숨결

감수성의 언어는 효율적이지 않다.
측정되지 않고, 때로는 불완전하며, 명료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모호함 속에야말로 예술의 숨결이 있다.
그것은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존재가 서로에 스며드는 언어다.

교육은 결국 타인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느낌의 속도를 맞추는 일이 아닐까.


감수성의 언어를 회복하는 일

나는 여전히 묻는다.

오늘의 문화예술교육 언어는 예술의 감각을 품고 있는가.
그 언어는 살아 있는 예술의 결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정책의 효율과 행정의 수사로만 말하고 있는가.

예술이 다시 교육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길은
효용의 언어를 비판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섬세하게,
감수성의 언어를 회복하는 일에 있다.




작가메모.

"예술교육은 정답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감각이 자라날 수 있는 온도를 지켜주는 일이다."


이전 01화다시, 감수성의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