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곁에 두는 일

아이들의 마음 곁에서

by 서히



예술을 가르친다는 일은 언제나 모순적이다.
예술은 본래 가르칠 수 없는 것에 가깝다 여기는데,
어쩌면 나는 그 불가능한 일을 매일 도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 수업을 하게 된 이후, 나의 고민은 늘 비슷하다.
‘예술에 대한 감수성은 과연 가르칠 수 있는 걸까?’
‘예술의 감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종종 말보다 침묵을 택한다.
가르치지 않으려는 가르침,
알려주지 않으려는 배움.
그 묘한 역설 속에서 교육의 본질이 드러난다.


노래가 그림이 되고, 마음이 빛나는 순간

나는 음악을 가르친다.

좋은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악보를 정확히 읽고, 바른 음과 리듬으로 노래하도록 돕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내 수업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가이다.

수업을 통해 어떤 정서를 전달할 수 있을까.


예술을 배우는 시간은 즐겁고 흥미로워야 한다.
아이들이 음정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그 시간이 웃음과 따뜻함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순간 이미 예술의 씨앗,
“이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구나.”
“노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구나.”
그 감각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진다.


어려운 내용을 다루는 날이면
나는 내 텐션을 조금 더 끌어올린다.
아이들의 집중이 흩어질 때면
음악을 다시 ‘놀이의 언어’로 되돌려 놓는다.


수업의 리듬은 단지 박자에 있지 않다.
그건 교사와 아이의 마음이 공명하는 속도에 있다.
노래가 완벽히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그날 준비한 내용을 다 풀지 못해도,
그 노래를 함께 느끼는 얼굴들이 밝게 빛나면
그걸로 충분하다.


예술은 다르지만, 연결되는 언어

나는 종종 음악과 그림을 함께 엮어 수업한다.
그 노래가 색으로 번지고,
소리가 형태로 바뀌는 순간,
아이들의 세계는 새롭게 확장된다.

‘네 잎클로버’라는 노래를 배운 날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 잎 클로버가 사는 숲은 어떤 곳일까?
네 잎 클로버와 함께 사는 친구들은 누구일까?"

그 한 문장의 질문으로 아이들의 세계는 달라진다.
누군가는 새를,
누군가는 비를,
누군가는 햇살을 그린다.

노래 속 한 구절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다시 마음의 울림으로 돌아온다.

그건 아이들의 예술적 정서가 자라는 순간이다.


예술과 친구가 되게 해주는 일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서로의 그림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
그날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는 작은 콧노래를 들으면
나는 비로소 안다.


예술을 가르친다는 건
결국 아이들의 마음 옆에 머무는 일이라는 것을.


노래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감정이 되고,
감정이 다시 노래로 돌아오는 그 순환 안에서
예술은 살아 있다.


예술을 곁에 두려면,
결국 예술과 친구가 되게 해주어야 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치며
항상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오늘 만날 동요 친구는 ○○야.”

아이들은 ‘노래’를 배우러 오는 게 아니라,
‘친구’를 만나러 오는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선다.
그렇게 시작된 수업은 어느새 대화가 된다.
“이 노래 친구는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이 부분은 속삭이듯 부르면 더 기분이 좋을까?”


노래는 점점 아이들의 감정 속으로 스며들고,
그 안에서 하나의 생명을 얻는다.
그건 더 이상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아이들 곁에서 함께 자라는 존재가 된다.


나는 예술을 그런 방식으로 곁에 두고 싶다.
성과로 증명되는 대상이 아니라,
친밀한 감정으로 연결되는 존재로서의 예술.
아이들에게 예술이 그런 친구가 된다면,
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어느 순간마다 예술로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작가메모.

"예술을 곁에 둔다는 건
결국 예술과 친구가 되게 해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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