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 동생과 함께 워홀로 위해 호주에 가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것은 안락하긴 하지만
나는 호주로 떠나면서 이제 내 삶을 스스로 지탱하는 독립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또한 호주로의 어학연수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고군분투했던
여태까지의 내 삶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렇게 부모님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마주한 호주 생활은 낯설었지만 새로웠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적응을 위해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호주에 조금씩 적응을 하고 내 삶을 돌아보니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안락했던가를 다시금 알게 해 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 스스로 하지 않으면 내 몸 하나 닦을 마른 수건도 없었다.
눈 깜빡하면 금방 가득 차있는 쓰레기통
뭐하나 먹으려고 해도 내가 사 오지 않고, 요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물한 병에서부터 냉장고 속에 것 까지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소한 것부터 내 손이 닿지 않고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집에서는 이 모든 것을 부모님이 대신해주었던 것들이다.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부모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마구 샘솟았다.
내가 지금까지 편안하게 누렸던 혜택은 모두 부모님들의 수고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또 한편으로는 내가 스스로 하는 것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족스럽다.
하나하나 내 손으로 만들어가는 삶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호주를 처음 올 때에 동생과 함께 아빠의 지인이 운영하는 월홀 단체에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단체에서 나 홀로 나왔다.
동생은 그런대로 적응을 하는데 나는 규율이 정형화된 단체 생활에 도무지 체질이 맞지가 않았다.
단체 속에 있으면 안전하고 비용이 절감하며, 어학공부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안 맞아서 나왔다. 아빠도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하셨다.
아빠와 가톡, 전화, 이메일 통한 많은 대화 끝에 기꺼이 허락해 주셨다,
단체에서 나온 나는 시드니 사내에서 스스로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언제나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벌어 내가 쓰는 것은 건강한 경제관을 가지게 하고
스스로 삶을 관리할 줄 알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부모님께 받아만 쓰다 보면 돈의 가치를, 돈이 얼마나 벌기 힘든 것이지를 잊고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살고 있다.
나는 아직은 영어를 잘하지 못하다.
그래서 같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초밥집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주방일은 몹시도 험했다.
회 뜨는 날카로운 칼에 때때로 손을 베이고, 약품으로 시작한 지 한두 달 만에 손이 다 갈라지고 매일 10시간 근무에 시달린다. 하지만 나는 독립적 삶을 위해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텼다.
힘들게 4개월을 일하며 생활비와 자금을 열심히 모았다. 목표가 있어서이다.
1년 비자인 워홀 비자를 한해 더 연장시키고, 호주에서 보다 다양한 경험들을 많이 하고 싶어서이다.
호주에 있는 우프 제도와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준비를 했고,
마침내 호주에서 만난 친구와 새로운 경험을 위해 우프(WWOOF)를 떠나게 되었다.
우프란 우리 같은 외국인이 호주 시골마을을 여행하며
호주 시골의 일손을 돕고, 호스트는 우리에게 음식과 숙박을 제공해주며
주말에는 주변을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이러한 우프 제도와 프로그램들이 있다.
결국 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로 와서는 처음 호주 올 때 생각과도 다르고
동생 하고도 다른 길과 코스를 가게 되었다.
우프(WWOOF) 제도를 활용하여 호주지역사회에 깊숙한 곳들에 들어가
백인사회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을 가게 되었고.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든 곳에서 살면서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영어회화를 체득하는 과정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 나의 호주살이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