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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역사 Mar 10. 2021

일제에 협력했다 해서, 모두 악인은 아니다 (아웅산)

1시간 만에 이해하는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그 4편

이 브런치북을 발행하기 앞서,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이 글은, 미얀마 사태를 보다 본질적으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보자는 취지로 만든 콘텐츠입니다.




미얀마 국민의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전편 : 3편, 미얀마 쿠데타, 그 배후 세력은?






미얀마 군부쿠데타 관련 기사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름, 바로 아웅산 수치.








아웅산 수치는, 사실 그녀의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우연과 그로인한 선택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웅산 수치의 운명은 특히나 더 그랬다.


미얀마의 군부 독재 1기가 무너져가던 8888항쟁 때, 미얀마의 시위대가 잠시 조국에 방문한 그녀를 아웅산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급작스레 추대했기 때문이다.



88항쟁 : 1988.8.8.에 일어난 미얀마의 민주 항쟁. 미얀마 군정의 화폐 회수 정책에 분노한 민중이 일어났다. 수천 명의 시민이 군부로부터 희생당했다. 이로인해 미얀마 군부는 자신들의 절대권력에 대한 명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 투쟁의 결과, 아웅산 수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사실, 당시 아웅산 수치는 14살 이후로 미얀마에서 둥지를 튼 적이 없다.




아웅산 수치(맨앞)과 아웅산(오른쪽) 가족사진 (출처: 교도통신)




미얀마의 국부, 아버지 아웅산의 죽음도 그녀가 고작 2살배기일 때였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 날 리 없다. 14~44살까지 미국과 영국 등 서구중심의 생활을 했다. 미얀마의 혹독했던 독재기를 함께하지 않았다. 마침 1988년, 어머니의 임종을 기 위해 조국에 들어왔다가,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하는 학생들의 동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물론 그 후로 군부로부터 가택연금 등 갖은 고초를 겪고, 1993년에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8888항쟁 당시 학생 운동 세력이 그녀를 끌어들인 이유는, 국부인 아웅산 장군 딸이란 상징성 때문이었다. 군부 독재를 끝내기 위해선 결국 시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내야했고, 국부의 딸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이보다 큰 명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이유...



 아이러니하게도, 미얀마 군사 정권의 기원이 미얀마 독립군이고, 그 창시자가 아웅산 장군이다.



미얀마 지폐, 아웅산 장군이 일본제국의 군복을 입고 있다.




게다가, 미얀마 독립군은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 전략에서 나온 작품이다. 다시말해, 아웅산 장군은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일본 제국주의가 키운 인물이다.






'역사의 선악'을 함부로 평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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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선 아웅산의 전 일대기를 짚기 보다는, 그가 세계 역사에서 어떻게 존재감을 드러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고있는 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일본 제국에 협력한 독립운동가(?), 아웅산 장군







일제에 협력한 독립운동가? 말이여 방구여?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이자, 미얀마의 국민영웅인 아웅산 장군!


그는 영국 제국주의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그가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취했던 방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제국군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끝에 미얀마가 보인다!)




역사를 몰랐던 대한민국 국민으로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 나도 그랬다. 하지만 전편에서도 말했듯이, 국제관계는 동물의 왕국... 즉,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유엔 헌장과 같은 '선(善)'은 보편적 명분으로만 '이용'될 뿐이다.





국제관계에서 적의 적은, 곧 아군.








미얀마 독립군의 적은 식민모국인 영국이었고, 일본제국 또한 히틀러와 손을 잡고 영국과 싸우고 있었다. 미얀마와 일본의 이해관계가 드러맞았던 것이다. 김구의 대한광복군이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연합(영국, 미국, 중국)과 손을 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1943년 일본 도쿄 대동아 회의. A급 전범 도조 히데키를 중심으로, 가장 왼쪽이 버마독립군




1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역사속 국제관계는 그 어떠한 '선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국의 이익이 곧 '선(善)'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전세계가 월드와이드웹 연결망이 없던 정보의 품귀 시대에는 더더욱 그랬다.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60년 간 당했기에, 독립을 위해선 제2차세계대전 영국(연합국)의 적수인 나치와 일제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대한광복군은 미얀마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듯이...



일제에 대항해, 연합군과 손을 잡은 대한광복군 (좌측 세번째 김구 선생)



우리 독립군은 일본 제국주의를 끝내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고 일본과 싸웠다. 실제로 미얀마의 임팔전투(1944)는 영국과 일본이 미얀마 임팔지역에서 맞붙은, 제2차세계대전 대전투였는데, 여기에서 한국광복군은 영국을 도왔고, 미얀마 독립군은 일본을 도왔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이 전투에서 대패해, 영국과 프랑스에게서 뺏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도로 토해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일본 제국과 나치에 협력했다고,
아웅산의 무덤에 침을 뱉을 수 있을까






우리 살면서 어떤 현상의 전후 맥락을 잘 파악하지 않은 채 섯불리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포털 메인 언론과 같은 '권위자'가 선별한 정보일수록, 의심없이 빠르게 옳고그름의 가치판단을 해버린다. 




만약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일제와 나치만을 절대악으로 규정해버린다면, 이와같은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용서받기 힘든 전쟁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과 나치는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미국 할리우드에서 '악의 세력'으로 규정되는 경향도 없않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을 우선 보여준다



이와같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물론, 일본과 나치는 다시는 있어서 안될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 행위를 수없이 저질렀던게 사실이다. 많이들 알고있듯이, 가스실에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일본은 731부대를 통해 식민지인들을 실험쥐마냥 생체실험에 활용했다. 천재 시인 윤동주도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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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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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731 부대 책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미국이 731 부대가 진행한 모든 실험 데이터를 미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부대 간부들을 제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31의 인체 실험 연구 결과들은 미국에 여러 모로 쓰임새가 많았다. 결국, 1947년 8월 1일 미국 정부는 전범 면책을 추진했다.






그 외에도, 미국은 흑인을 대상으로 매독 생체실험을 하다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역사는 승자와 패권세력에게 유리한 정보 위주로 공개되어 있단 사실을 알아두면 여러모로 외신 뉴스가 달리 보인다.






어떤 나라가 선해서 한국을 일제 식민지에 벗어나게 해주고,


우리를 보호해주는 건, 국제 정치엔 존재치 않는다.





미얀마의 역사도 이런 삐딱한 관점으로 바라볼수록, 아이러니하게도2021년에 군부 쿠데타가 왜 일어났는 지 인과관계가 좀더 명확해진다.

역사는 알면 알수록, 우리가 신앙처럼 믿고있는 '선과 악'의 개념을 깨준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만물을 판단할 땐, '전후 맥락'과 '충분한 숙고'가 필요하단 걸 깨우쳐 주기도 한다.




(다음화 계속)




위 포스팅은 [1시간 만에 이해하는,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가제) 브런치북으로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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