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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역사 Mar 16. 2021

미얀마 광복은 사실 '광복'이 아니었다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1시간 만에 이해하기 #6

이 브런치북을 발행하기 앞서,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이 글은, 미얀마 사태를 보다 본질적으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보자는 취지로 만든 콘텐츠입니다.




미얀마 국민의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전편 : 독립영웅 아웅산은 왜 제국 일본에 열광했을까? #5





대한민국에게 8월 15일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이날을 광복절(光復節)이라 부른다.




광복절 : 우리나라의 광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한 국경일.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날로, 8월 15일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사실 학계에서 봤을 때, '광복절'은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1945년과 1948년의 8월 15일을 모두 기리는 날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에게서 해방(독립)된 날을 기념하고,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광복1 (光復) : [명사]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음.
[표준대국어사전]





이 사전적 정의에서 모든 오해가 비롯된다.
광복절이 정말 우리의 '주권'을 되찾은 날일까?
결코 아니다




독립운동가 함석헌 시인은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고 했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박헌영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이 왔다."고 했다.


그만큼 자주적으로 얻어낸 해방도 아니었고,

준비된 해방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미일전쟁(태평양전쟁)에서 광복절 일주일전에 원자폭탄 두방을 맞고 급하게 물러난 탓이다.  그러면서 한반도에서 모든 발을 뺐다. 우리 힘으로 얻은 독립이 아닌만큼, 주권은 우리에게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렇게 25일 뒤, 조선총독부에 미군정 깃발이 올라갔다 들어섰다.






1946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여(좌), 같은달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여(우)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여되고 정확히 한달 뒤,

조선총독부 건물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게양된다]


▲ 1948.9.9. 서울에 진입한 미군이 조선총독부 광장 앞 국기게양대에 걸린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고 있다











우리는 '자주 독립'에는 실패한 게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광복절이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36년간 나라 없는 설움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우리에겐 아주 큰 의미가 있다. 분단은 됐을 지언정... 어쨌든 나라는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남과 북을 3년간 재점령하고 분단을 유도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형식적으로나마) 우리만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대한 국민은 미국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맛본 게 엄연한 사실이고, 그 역사 속 기억 덕분에 '해방'을 겪었던 윗세대 어른분들 중엔 지금도 '미국에게 고맙다.' 하는 분들이 더러 계시다.










대한민국에게 식민지 '해방'의 경험을 맛보게 해준 건, 미국임에 틀림없다.








이 역사를 미얀마가 똑같이 겪었다.



다만, 영국으로부터 60년 식민지에서 '해방'의 감각적 경험을 맛보게 해준 주체가... 대동아 공영권의 '일본 제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일본 제국의 미얀마발 선봉대가 바로,


현재 군부에 의해 구금된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다.






2015년 선거 승리 후, 아버지 아웅산 사진에 기도하는 아웅산수치






일본 제국은 동남아시아의 대동아 공영권을 실현하기 위해, 미래 미얀마 민족 지도자인 아웅산을 발굴해 키워갔다(전편 내용). 그렇게라도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30인의 지사'가 하이난 섬에서 미얀마 독립을 위한 지옥 훈련에 들어갔다(1940). 혹독한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훗날 미얀마 건국세력이 되어 3천 만의 지도자가 되고, 결국 오늘날 군부 쿠데타 세력의 기원이다. 역사에서 쉽게 선과 악을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렇게 일본의 진주만 공습 한달 전(1941), 이들은 버마독립의용군으로 정식 출범한다.]

현 미얀마 건국 세력이자 군부의 기원, 버마독립의용군 (맨아래줄 가운데 아웅산)







하나의 피, 하나의 소리, 하나의 사명




이 당시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버마독립군의 군사 모토였고, 이는 현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일본의 세밀한 지도를 받은 '버마독립의용군'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이해관계가 들어맞았기에 뜻을 함께 했다. 결국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미얀마 내 영국군을 몰아낸다(1943).





그렇게 1943년 8월 1일,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해방)을 쟁취했다.





실상은 만주국처럼, 일본군 사령관에 권력이 있는 위성 국가였지만 미얀마 국민들에겐 독립국으로 인정받는 경험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마치 우리가 8월 15일 '해방'을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수장이자 얼굴 마담은 역시 아웅산이었다.




마치, 우리의 광복절 같지 않았을까?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나라 몇몇분들이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의 덕을 미국으로 돌리듯, 미얀마 국민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일본에게 고마워했다. 그들도 이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서구 식민지에서 벗어나, 대동아 공영으로 인해 해방을 맛본 동남아 국가들이 오늘날까지도 일본 문화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있는 한 이유기도 하다.





[혹독한 서구의 식민지 역사를 겪었던 동남아시아]

출처 : 서울대 아시아 연구소






아웅산은 미얀마 대표로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도 참석받았다. 피식민국으로서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공식 인정받은 첫번째 외교이기도 했다. 아무리 허울뿐인 독립이라 할지라도, 미얀마 국민들에게 이는 뜻깊은 역사적 경험이었다.






1943년 일본 도쿄 대동아 회의. 맨앞 가운데가 A급 전범으로 처형된 도조 히데키, 가장 왼쪽이 버마독립군






역사적 경험의 위력은 가히 엄청나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제2차대전에서 원폭을 맞고 패했다(1945.8.). 그렇게 승전국이었던 영국이 미얀마를 재점령하려 했지만, 자기 나라를 되찾은 역사적 경험의 감격을 맛본 미얀마인들이 이를 허락할 리 만무했다. 결국 영국은 1945년 총선거에서 전후복구사업 공약을 내세운 노동당이 승리하는 내부사정과 맞물려, 모든 식민지에서 발을 뺀다. 그렇게 세계 패권 국가였던 영국은, 제2차대전 이후로 오늘날까지 '해가 지는 나라'가 되었다.




그 대영제국의 무책임하고 갑작스러운 행태는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씨앗이 된다.



(다음화 계속)






위 포스팅은 [1시간 만에 이해하는,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가제) 브런치북으로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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