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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May 10. 2019

005  그 섬의 푸른 숲

제주 위트 에일


  


  지난번에 소개해드린 La Sagra 맥주에 견줄만한 완성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순전히 주관적인 취향이지만) 과일향이 나는 우리나라의 Ale 에일 맥주 중에는 제주 위트 에일이 단연, 가성비 괜찮은 맥주입니다.




  제주도의 맑은 물과 감귤 껍질로 만들었다는 에일 맥주이지만, 상대적으로 도수가 낮아서 (5도가 살짝 넘는), 맛의 강도로만 봐서는 라거인지 에일인지 헷갈렸었거든요. 그래도 상큼한 시트러스 향은 확실히, 이 맥주의 귤탱탱한(!) 개성을 잘 나타내 줍니다. 제주도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맥주 광고를 하고 있지만요, 굳이 제주도 음식에 한정되지는 않겠죠. 고기 비린내 나는 음식이나 횟집에서 먹는다면 시원하고 상쾌한 목 넘김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비슷한 맛의 족보를 따지자면, 한국의 'Blue Moon 블루 문'으로 부를 수 도 있겠어요.




  

  개성 있는 효모의 맛을 느껴야 하는 에일 맥주들은 이왕이면 전용잔에 마셔야 한다고 해요. 흔히 먹는 카스나 칭다오 같은 라거 맥주들은 그냥 드셔도 괜찮지만, 에일 맥주는 끝이 슈숙~ 올라오는 에일 전용잔에 맥주를 담은 후 1/3 정도는 병에 남겨 두었다가 효모를 흔들어 부어먹는 맛이 권장사항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저는 나름(!) 입맛이 예민한 편인 데도, 5도 남짓의 제주 위트 에일에서는 효모의 맛을 잘 느끼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마실 때는 그냥 병으로 훅 마셔버립니다. 무엇보다, 설거지도 귀찮고 해서요.


  하지만 손님들에게는, 혹시 저처럼 효모 맛을 느끼시지 못하더라도 전용잔에 ‘정석’으로 대접해 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제가 아직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일단 퇴근하면 여기서는 꽤나 진지한 바텐더이니까요.






  그 섬에 가고 싶다


  올해 초에 제주도를 다녀왔지요.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혼자서 제주의 이른 봄을 맞이하고 왔답니다. 거의 10년 만의 제주 방문이라, 공항에서 받은 가이드 브로셔와 직장 동료가 카톡으로 보내 준 추천 루트를 찍고 왔는데, 4일의 일정이 너무 짧아서, 돌아오는 길이 많이 많이 아쉬웠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얼마 전에 도로 확장에 따른 환경 문제로 이슈가 되었던 제주 성산 쪽의 ‘비자림’이었습니다. 비자림은 보통 사오 백 년쯤 오래된 비자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이라고 합니다. 첫인상은 평범한 등산로 같은 풍경이었지만, 숲길을 따라 들어갈수록, 점점 이 숲에 녹아드는 신비로운 기분이 드는 곳이지요.

 

  보통의 수목원에 들어 서면, 거대한 크기의 쭉쭉 뻗은 나무들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런 울창함은 한편으로는 압도되는 느낌을 주기도 했어요. - 아, 나무들에게조차 주눅 드는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멘탈이라니.


  하지만, 제주도 비자림의 오래된 나무들은 마냥 편안하기만 했어요. 나이 드신 ‘엄마들의 숲’ 같은 곳입니다. 나무들이 힘차게 위로 자라기보다는, 반갑게 팔을 활짝 벌리고 나를 맞이해 주는.


  나무들 뿐만 아니라, 오래된 숲을 뒤덮은 푸른 이끼들이 이 숲의 풍경을 더욱 포근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마치 초록색 포대기를 두른 할머니 나무들이 손자 손녀를 업고서 마을 어귀에서 미소 짓고 있는 듯, 객지에서 고생하던 자식을 반겨주는 엄마의 초록빛 고운 미역국 같은, 마음 편안하고 고요한 숲이랍니다.




  






  비록 에일을 숙성시켜주는 효모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들에 의해, 술의 운명이 바뀝니다. 그처럼, 우리의 일상에서도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느끼지 못하는 작은 것들이, 사사로운 삶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내가 깜빡 잊은 누군가의 오래된, 사소함. 나를 아껴주던 작은 한 마디. 그리고 결국은 그 작은 차이들이, 나를 조금씩 덮어 가며, 결국 인생 전체의 색깔을 바꿔놓기도 할 것입니다.


  비자림의 나무들을 덮고 있던 포근한 이끼들이, 어쩌면 이 오래된 숲을 만들어 온, ‘효모’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나는 가만히 나무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행여 이끼들이 다칠까 봐, 살며시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이 작은 초록색 아가들까지, 소중히 아껴주렴’


  늘 크고 거대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욕심 많고 거친 삶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가냘프게, 여리게, 얇게, 하지만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는 사소한 것들을. 그 ‘작고 작음’을.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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