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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은 May 26. 2019

008  그 여름의 빨강

수레오 (Sureo) 상그리아


  오늘은 오월의 한낮 치고는 날씨가 많이 더웠습니다. 처음으로 집에서 에어컨을 켰다니까요. 작년 여름에도 많이 더웠었는데, 아니! 벌써부터 이러면 얼마나 더울까.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네요. 이런 더운 날, 시원하게 잔을 얼린 생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도 좋지만요, 얼음을 띄워 새콤달콤하게 즐길 수 있는 스페인산 스파클링 상그리아, 수레오 (Sureo) 한 잔을 추천해 드립니다.




   먼저, 상그리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자면, 상그리아는 와인에 과일 혹은 탄산수나 다른 과일주를 살짝 섞어 마시는 술입니다. 와인과 과일을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이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아요. 당연히 상그리아는 베이스가 되는 술과 들어가는 과일에 따라 그 종류가 무진장 많을 수밖에요. 다들 이해하시죠? 술을 섞는 것은 모두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인 데요, 뭘.


  원래는 레드 와인을 베이스로 한다고 하지만, 어디서는 화이트 와인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보드카를 섞는 미국식 상그리아도 있고 (과연 이걸 상그리아로 불러야 할지 애매한), 상그리아를 즐기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놀이터마다 아이들의 놀이규칙이 다르고 노인정마다 고스톱 룰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수레오(Sureo)는 좀 시원하게 먹어야 그 참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상온에서 먹으면 상그리아 답지 않고 '와인 소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알코올은 5.4도에 레드 와인을 베이스로 하며, 스파클링이 그리 강하지도 않게, 오렌지를 가미한 달콤한 상그리아입니다. 따라서, 딱히 흠잡을 데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색 있는 상그리아라고 말하기는 좀 까리한 편이죠. 그래서, 그 자체로도 참 괜찮지만 여기에 더 섞어(?) 볼 생각이 있다면 그것 또한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단 맛을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드라이 진이나 보드카에 토닉워터를 넣어 먹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입니다만, 그렇게 드신다면 다음날은 꼭 휴가를 내고 시작하시기를 권합니다.






  섞어 마시는 음주문화라면 우리나라도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민족이기에, 사실, 이런 상그리아는 전혀 낯설지(?) 않은 스타일이죠.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 오노라." 술 한잔을 부어들고, "옛소 도련님 약주잡수! 금일송군 수진취(今日送君須盡醉:오늘 임을 보내니 실컷 취하여보자) 술이나 한잔 잡수시오." 도련님이 잔을 들고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천하에 못 먹을 술이로다. 합환주(合歡酒)는 먹으려니와 이별허자 주는 술은 내가 먹고 살어서 무엇허리!"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이렇게 자기 여자 버리고 출세하겠다고 한양으로 떠나는 나쁜 남자, 이몽룡에게 열여섯 춘향이가 이별의 술을 권합니다. 저는 이게 과연 무슨 술일까 궁금해서 여기저기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네네, 저는 이상하게도, 대학생 시절에도 이런 게 궁금해서 중앙도서관 2층 국문학 코너에서 이 술의 정체를 밝히려 며칠을 돌아다녔답니다)  


  다른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춘향가"는 여러 버전이 있어서, 어느 것이 정설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신학균본별춘향가"라는 버전에 따르면, '화소주'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고 또 다른 여러 버전에 따르면 '감홍로'라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감홍로'는 기방에서 흔히 먹던 붉은 누룩을 넣어 만든 달달한 소주라고 합니다. 한편, 여기에 꿀을 탄다는 의미의 '화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고, 국화 같은 꽃의 향기를 담가 우려낸 술을 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열여섯 춘향이는 '폭탄주를 제대로 말아' 먹일 줄 아는 화끈한 미성년자였습니다. 멋져!!








  더운 여름에 어울리는, 수레오 상그리아를 한 잔 마시다가, 색깔이 비슷한 '수박화채'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맞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놀러 가면 늘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시원한 '수박화채'와 미숫가루가 그리워집니다. 하지만,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우리 할머니의 수박화채.


  누리끼리한 '탐구 생활'을 싸들고 한 달씩 외갓집에서 할머니랑 놀던 시절. 엄마와는 달리, 너그럽기 한이 없던 우리 할머니 덕분에 참 버릇없고 제멋대로 였던, 외갓집 생활. 할머니 주무시는 밤에 애국가 나올 때까지 매일 TV를 보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주말의 명화'를 다 보고서 잠이 들어도 야단맞지 않아, 신나던 여름방학.


  그 여름 한 복판, 빨갛고 달콤한 수박화채 한 사발.


  할머니는 이제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하세요. 오래된 앨범에서의 우리 할머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였던 나를 안고 계시는 환한 얼굴의 중년 여인이었는데, 이제는 숨 쉬는 게 가여울 정도의 앙상한 뼈와 비닐 같은 살 껍데기를 겨우 두르고 있는 어떤 '존재'입니다. 사람 혹은 생명이 있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냥, 어떤 '존재'.


  요즘엔 나를 못 알아보시는 듯 하지만, 다가가면 차고 떨리는 그 손으로 나를 많이 쓰다듬어 보려 하신답니다. 처음 보지만 그냥 이름 모를 포근한 인형의 잔털을 만져보고 싶은, 아기의 눈빛이 가만히 새어 나오는 걸 느낍니다. 내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도, 그냥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시는가 봐요. 보이지 않을 만큼 감겨진 할머니의 눈꺼풀 아래로, 그런 눈빛이 실낱처럼 가물거리곤 하더군요.


  할머니와 나는, 설령 목소리로 말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한쪽이 다른 쪽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의 깊은 기분을 알 수 있는 사이인 게 분명해요.            


  날이 더우니, 그 여름의 빨간 수박화채가 너무 먹고 싶어요. 할머니의 화채를 허겁지겁 비우고 선풍기 바람에 얼핏 잠이 들었다가, ‘여기는 매미 소리가 시끄러워서 낮잠을 못 자겠다’고 괜스레 짜증을 내던 그 아이는, 이렇게 나이만 많지 그동안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 참 한심한 어른이 되었네요.


  할머니, 미안해요.


  ...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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