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숙희 Sep 12. 2023

게으른데 굶어 죽긴 싫고

프리랜서 일기_2023년 9월 12일

     마감이 11월 말인 작품을 작업 중인데 도무지 진도가 쭉쭉 나가지질 않는다. 올해 2월에 기술번역 일감을 주던 회사가 사정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일감을 받지 못한 지 꽤 되었다. 기존 회사에서 일하던 프리랜서들의 인사 기록이 다른 회사로 이관될 예정이라며 개인정보 이관 동의서까지 받아 갔기 때문에 두어 달 기다리면 다시 일감이 들어오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일은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지난달 중순부터 이력서를 넣어가며 다시 일감 받을 회사를 구하고 있다.


     마감까지 수개월의 여유가 있는 출판 번역과 달리 로컬라이제이션 쪽은 일주일 남짓한 기안 안에 작업을 완수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나한테는 마감이 자주 짧게 있는 쪽이 더 맞는다. 마감 기한까지 몇 달이 남아 있으면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모두 즐기고 막판에 쫓기듯 작업하게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산업번역 쪽은 미룰 수 있는 여유가 거의 없어 게으름 피우지 않고 바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습관이 든 이유는 재작년까지 다른 일과 번역을 병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꾸준히 들어오는 수입이 있어 서둘러 작업할 필요가 없었다. 출판 번역 원고료로는 한 달에 한 권은 작업해야 간신히 직장인 수준의 수입을 얻을 수 있는데, 내 작업 속도와는 별개로 갓 데뷔한 초보 번역가로서 내게 한 달에 한 권이나 작업 의뢰가 들어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출판번역에만 '올인'하기에는 수입이 불안정했고, 파트타임으로 직장을 다니고 산업번역 일감도 받아가며 부족한 수입을 메꿔왔다. 2019년 말부터 출판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같이 작업하는 출판사가 생길 정도가 되었고, 작년에 드디어 직장을 그만두고 완전한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올해 초 산업번역 일감을 주던 회사가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더라도 조금만 더 부지런했다면 금방 다른 일을 구했을 텐데, 몇 개월을 넋 놓고 보내는 바람에 곧 손가락을 빨게 생겼다.


     오래전에 구인사이트에 저장해 두었던 이력서를 업데이트하고 여기저기 찔러본 결과 지금까지 두 회사에서 샘플테스트 의뢰가 왔다. 번역을 전업으로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다른 분야에서 일을 구하기보다는 번역 쪽 일을 구하려고 노력 중인데, 구직활동을 하다 보니 번역 산업 자체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공고마다 지원자가 넘쳐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합격해서 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번역 단가를 보장받기 힘들다. 먹고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나 싶다. 다른 길을 찾기에는 아직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보지 않은 것 같아 미련이 남으니 올해까지는 버텨볼 생각이다.


     지난해에는 노트북 하나 들고 유럽에서 1년을 살았다. 여행과 일의 균형을 맞추기가 생각보다 힘들었고, 유럽 물가에 비해 아직 벌이가 부족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이렇게 먹고살 걱정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프리랜서의 숙명이라면, 나는 과연 평생 이런 불안을 안고 살 수 있을까? 불안함을 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상을 받으며 일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당장 뾰족한 수를 찾기는 힘들 테지.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어 두었으니 오늘 할 일이나 열심히 하다가 이따 구인사이트나 기웃거려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