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는 좀 쉽시다
그 당시 직원들의 사장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다. 사장이 외부인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조직 내 관행과 문화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공개적으로 토로했고, 조직 개편과 대대적인 인사를 통해 조직을 강하게 휘어잡으려 했다. 이전에 보지 못한 강력한 변화는 많은 사람을 당황케 했지만 그중에서 영향력이 큰 아이템을 꼽아보라면 아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1. Global
2. 불 꺼지지 않는 우리 회사
이전까지는 영어 혹은 글로벌 감각이 직원 평가에 크게 고려된 적은 없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 영어가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해외 동종 업계 사람들과 교류하고 정보를 나누는 것도 나쁠 것 없지 않은가? 영어 우선주의를 내세우던 사장에게 살짝 반기를 들었다가 다음 인사 때 좌천된 부서장의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사실 나 같은 말단 직원에게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째 키워드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전 직장에서 '주말에 주차장의 차 번호판을 점검하고 출근하지 않은 사람을 혼냈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던 사장은 정말 엄청나게 열심히 일했고, 자연스레 부서장에서 팀장, 차/과장, 조사역까지 압박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는 조사연구와 상관없는 자산운용 부서라 상대적으로 압박이 덜했지만, 처음부터 조사연구 부서에 배정된 동기들은 듣기만 해도 얼굴이 창백해질 만한 업무강도에 시달려야 했다. 입사시험 수석을 하고 최고 핵심 부서에 배치되어 전 동기들의 부러움을 사던 동기 M의 얼굴은 몇 달만에 심하게 초췌해졌고, 괜찮은 것 맞냐는 질문에 전혀 괜찮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노조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노사 협상 때마다 근무 환경에 대한 의제를 꺼냈지만, 사장은 언제나 '나는 높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라는 거지 전부 야근하라는 게 아니다. 억울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고서의 내용을 채우는 건 차/과장 급의 실무자이고 팀장이나 부서장은 원고의 리뷰 및 수정 지시를 하는 관행을 생각해 보면, 높은 사람이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부하 직원이 퇴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부서장은 본인이 퇴근한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 종종 PC와 사무실 전원을 내리지 않고 퇴근해서 아래 직원들이 쉽게 집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남기신 유언이 떠오른다. 암. 나의 퇴근을 적(?)들이 알면 안될 것이다.
험난했던 결제팀에서의 2012년이 끝났다. 바쁜 와중에서 결혼 준비도 하고 틈틈이 야구도 하느라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한 해가 끝났었던 것 같다. 보통 조사역때는 2년에 한 번씩 다른 부서로 옮기곤 하는데, 나는 2년 연속 이 부서에서 고생한지라 이번에는 꼭 금융상품을 거래하는 Front Desk에서 일해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팀장, 부장, 심지어 부서장에게까지 부서 잔류 의사를 간곡히 전했고, 부서장은 심지어 점심 자리에서 "야, 너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데 내가 딴 데 보내겠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남들은 다 숨죽이며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인사 발표 당일에도 생각 없이 연수원에 통계프로그램 연수를 들으러 간 것이리라.
오후 수업을 듣던 중에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대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의 전화였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교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