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전화가 걸려올 때
2012년 어느 날 새벽, 자는 도중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다. 무시하고 자려고 해 보지만 계속되는 진동에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기를 집어 든다.
김 조사역, 여기 뉴욕사무소인데요, 오늘 결제일인 채권 전문이 뭔가 잘못되었다는데요?
아, 제기랄...
1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당연히 Front Desk의 채권이나 외환 거래 팀으로 가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부서 인사발령 문서를 본 순간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내가 2012년에 근무하게 될 팀이 부서의 최고 기피 팀인 '결제팀'이었기 때문이다.
결제팀의 업무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Front Desk의 운용 담당자가 금융기관과 거래한 채권, 외환, 예금을 실제로 우리 계좌에 무사히 도착하게 하는 것이다. 일을 잘하면 티가 안 나지만 하나라도 펑크가 나면 문자 그대로 전 팀이 난리가 나는 성격의 업무인 것이다 (1억 달러짜리 채권이나 예금이 내 실수로 계좌에 입금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라!!). 일이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히 이 팀에는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결제팀에 배정받는 조사역들에겐 '여기서 1년만 고생하면 내년엔 Front Desk 보내줄게' 등의 위로가 건네어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작년에 똑같은 말을 듣고 성과팀에서 1년을 보냈는데? 왜 1년을 더 굴러야 하는 거지?
늘 "난 조사역이랑은 겸상 안 해"라고 말하던 팀장이 6시가 되자마자 나를 끌고 조그마한 횟집으로 향했다. 내 자리는 늘 테이블 끝자리였지만 그날은 다른 팀원들을 다 제치고 팀장 앞자리에 앉아 술잔을 받았다. "미안하다. 한다고 해봤는데..." 1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열 잔에 가까운 폭탄주를 연달아 들이켰고, 만취한 상태로 지하철역 가는 길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하기도 했다. 뛰어난 인재들이 많은 금융 공기업에서 내가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구를 것이라고도 예상하지 않았기에 속상한 마음은 꽤나 오래갔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오더라도 결제팀의 첫 한 달은 혼돈과 악몽 속에서 보내게 된다. 난생 처음 듣는 용어와 생소한 시스템들, 어마어마한 업무량과 이에 따른 야근까지. 약 3천억 달러의 거대한 자산의 운용에 필요한 결제들을 매일 마무리지어야 했기에 업무량은 막대했지만, 단 한건의 실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이 일이 워낙 힘들어서일까, 많은 미혼 직원들이 결제팀 근무 중 결혼을 하고 길게 휴가를 갔고 (나도 마찬가지다), 과장 및 차장들은 "장가가고 싶은 조사역은 결제팀 오면 된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가장 힘든 건 사고가 언제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내가 꼼꼼히 자료를 검토하고 이것을 담당 책임자가 다시 검토한 뒤 일을 마무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인간인 이상 실수는 발생한다. 이 경우 대부분 해외 은행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전화를 주었는데 문제는 그 시간이 한국의 늦은 밤 혹은 새벽 시간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그쪽의 판단 착오라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잠들면 그만이지만, 정말 우리의 실수일 경우 그게 몇 시가 되었든 나, 담당 책임자, 시스템 담당자까지 최소 세명이 출근해서 시스템을 구동시키고 문서를 수정해서 보내야 했다.
그렇기에 2012년의 밤은 편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언제든 해외에서 전화가 와서 나를 찾을지 모르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회포를 풀던 금요일 저녁이든 한창 자야 할 새벽 시간이든 문제가 생기면 회사로 향해야 하던 나는 말 그대로 5분 대기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