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살다 보면 감정적으로 힘들어지는 순간들이 자주 생긴다.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병환, 친구와 지인들의 애사와 경사,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차별 등 이유야 다양하지만, 나의 경우엔 이 모든 것들이 자폐가 있는 아이의 미국 생활을 위해 지불한 대가이기에 누구에게 불평도 못하고 그저 어금니를 사려 물게 된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꼭 필요했던 미국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내가 포기했던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면 한국은행은 분명 최상단에 있을 것이다. 입행시험 재수까지 하면서 간신히 들어갔던 그곳. 첫 시험에 떨어지고 다음 해에 명동을 갈 때마다 얼마나 탈락을 약 오르고 아쉬워했는지. 유학을 나오면서도 이직 생각은커녕 2년 뒤 어떤 부서에 복귀하면 좋을지 생각했고, 퇴직 1주일 전까지도 복귀하면 발표해야 할 연수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물론 보수적 기업문화나 느린 승진 등 단점도 없진 않았지만, 한국은행은 최소한 나에겐 장점이 훨씬 많은 직장이었기에 새로운 회사에서 힘든 일들을 겪을 때마다 퇴사에 대한 후회로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2019년 여름 북버지니아로 이주했고, 사는 곳에서 차로 30-40분 거리에 있는 한국은행 워싱턴 DC 사무소에서 종종 지역 내 전직 한은맨들을 불러 세미나 혹은 해피아워를 개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어 번 초대를 받기도 했는데 차마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참석자가 대학 교수 혹은 IMF/World Bank 등 쟁쟁한 곳에 속해 계신 분들이었기에 집도 절도 없고 신분문제도 불확실한 이민자로 영락해 버린 나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라도 '회사 나가서 고작 그러고 있냐'라는 눈길을 받으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올해 여름, DC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열린 OB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한국은행 테니스부 총무를 할 때부터 안면이 있던 H가 새로운 사무소장으로 오신 후에 적극적으로 초대하기도 했고, 작년부터 신분 및 재정적 문제들이 풀려 가면서 심적 부담이 많이 덜어지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기 전, 다 같이 둥글게 서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박사 유학 후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이직하신 대부분의 OB들과 달리 '아이의 장애로 인해 미국 정착이 필요했고, 부득이 퇴사 후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은행 경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기에 너무나 감사하다'는 내 소개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옆에 서 있던 J 교수가 불쑥 '내 딸이 special needs 전문가인데 도움을 주고 싶다'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을 때만 해도 제안 자체는 감사했지만 과연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의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안배하신 만남의 축복이었던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들 태민이의 DD Waiver (Developmental Disability Waiver, 장애가 있는 사람이 주정부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한 절차) 프로세스에는 의사가 내린 공식 자폐 진단이 필요했는데,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 의사의 진단서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발등의 불이 떨어진 상황임에도 연락한 모든 병원들은 의사를 보려면 최소 12개월에서 24개월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J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고, 결국 따님의 학교 인맥을 통해 뉴욕에 있는 전문의를 소개받아 내년 1월에 방문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그저 스쳐 보낼 수 있었던 초면의 전 직장 후배에게 이러한 헌신적인 도움이라니. 내가 누구를 이렇게 값 없이 정성을 다해 도운 적이 얼마나 있었나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다. 또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준 한국은행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찡 할 뿐이다. 이전에는 슬픔과 후회로, 지금은 감사와 자랑스러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