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처럼 누리던 일상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나의 경우에는 유독 특별한 기대감과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었을 작년 2월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비슷한 사태를 몇 년 전 메르스 사태를 통해 이미 겪어봤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호들갑도 고작해야 몇 개월 가다 말았던 그 사태처럼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작은 해프닝이 아닐까 했다. 아마 그것이 한 두 달 후에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키며 급속도로 일상의 제어권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당시의 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매일같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때의 내가 사람들과의, 사회와의 거리두기에 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어느덧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잔인한 의무감으로 다가오는 지금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나는 코로나 이전의 삶을 살아봤고 지금은 코로나 이후의 삶을 살아간다. 코로나 이후의 삶은 1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한 살짜리 아이가 세상에 발을 들여놓고 고작 1년이 지났을 즈음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나마 실감되는 것이 있다면, 새로운 곳으로 발을 들인 인간은 그곳을 자신이 이전에 살던 곳과 비슷하게 경작해 나가려 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여러 가지 자유를 제한당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이전 생활로의 귀환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누가 아니겠는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는 장애물을 달가워할 리 없다. 거리를 떨어트려 놓을수록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사람 대 사회로서도 작용하는 만고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거리두기 상황에서도 인간은, 이렇듯 자신의 자리를 되찾으려 노력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전 삶을 되찾아 가려한다.
이미 이런 상황에 적응한 사람에겐 이전 삶이나 지금 삶이나 현재 시점에서 보면 별반 다른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느 환경에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울 수 있고, 달라지는 삶에 도전적으로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적응력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사회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현재에 휘청이지 않고 착실히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내 주위에 있는 멋진 친구들과 어른들은 불평불만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일상에 제약을 주는 것처럼 이야기하진 않는다. '도피하는 사람들'은 '적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에게는 없는 성실함과 꾸준함, 뚜렷한 목표 의식 등의 변명거리를 찾으려 한다. 이는 아마 그들이 걸려 넘어진 돌부리를 너무나도 간단히 뛰어넘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애써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적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일은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가진다. 과거에 있던 자신의 자리를 만든 것처럼 사람들과의 유대감이 줄고 인터넷으로 세상이 연결되는 현재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유로운 바깥나들이, 휴식을 만끽하는 여행, 따분한 저녁을 달래줄 각종 모임. 그들은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지 않는다. 홈 캠핑, 실내 취미 생활, 멍 때리지 않고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것.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사히 이런 생활을 즐겁게 해내다가, 때가 오면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자신이 할 수 없던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적응하는 사람처럼 살지 않다가는 언젠가 많은 것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적어도 뭔가를 많이 해야 한다. 일을 많이 하면 적응하는 사람인 척이라도 하며 살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본인이 '적응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기력하고 멈춰 있는 상태를 멈춰야 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도피자였던 이들에게 전하려고 글짓기 시간에 쓴 글이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