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라는 완고한 벽
이 벽을 넘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든다
완벽하다.
살면서 이 말을 들어본 순간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과거의 내 상태와 성취, 당당함, 뿌듯함이 밀려와 다시금 과거의 한복판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완벽을 기억하는 이토록 생생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완벽은 그때에만 존재하던 신기루에 불과했다.
완벽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가 맞닿아 있는 면이 늘어갈수록 힘들어지는 것 같다.
어렸던 학생이 점차 자라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이 더욱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는 더 많아지고 난이도 역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완벽하기란 쉽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외적으로도 완벽하고 내적으로도 완벽한 그런 사람이 지구 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것 역시 알고 있다. 완벽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보면 상대적이어서 그저 일반 시민에 불과한 내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완벽해 보인다는 건 허망한 꿈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생겨나는 이 욕심은 뭘까? 지나가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예쁜 연예인의 얼굴과 내 얼굴을 하나하나 대조해보면서 남들은 신경 쓰지도 않는 눈 사이의 거리와 미묘하게 비대칭인 얼굴형을 이토록 신경 쓰는 이유가 뭘까. 자존감이 낮은 것일 수도 있고, 욕심이 과한 것일 수도 있고, 오히려 내가 너무 오만해서 '이것만 고쳐지면 완벽할 텐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무엇이든 완벽을 향한 내 집착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곤 생각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내 모습이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사람은 기쁜 일보다는 슬프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글을 쓰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 나 스스로에 화가 나거나 슬픔을 느끼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다. 새벽 3시에 잠에서 깨어 관절염이 있는 턱을 딱딱 부딪혀 소리 나게 만들면서, 얼굴형 비대칭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이 턱을 원망하고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고 싶어 이미 수없이 찾아본 턱 교정 방법을 검색하고 있자니 환멸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직까진 이 환멸감을 정확히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고, 강박이 느껴지고, 외모지상주의에 찌들어 있는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내 턱은 내 외적인 아름다움을 저하시키고 있고, 걸림돌이 되고, 내가 손해 보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완벽을 향한 집착은 모든 것에 능통하고 잘나겠다는 모습에서도 드러나고, 어느 한 부분에 집착해 이것만은 개선했으면... 하는 끝없이 반복되는 욕구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지금 나의 모습은 후자의 욕구를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발... 이놈의 턱이 빨리 완치되어 듣기 싫은 소리도 안 나고 내 얼굴형도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다 이 일이 해결되면 '제발... 이놈의 고관절이 조금만 더 옆으로 튀어나왔으면..' 하고 남들에게는 유별나 보일까 봐 절대 말 못 하는 또 다른 욕구를 충족시키려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