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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꽃 Feb 26. 2022

오래된 아픔 하나

사랑, 아픔을 덮다. 

1. 

작년 가을. 

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냉담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노름 알코올 중독자에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 무책임한 한량이었던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어머니처럼 나도 집을 떠났다. 열아홉 살 때였다. 


그리고, 딸을 낳고, 집을 떠난 지 10년 만에 연락을 했다. 

엄마가 되었으니까.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을 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나 아이를 낳았어요."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그랬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자식 없는 중처럼 살 거니까 너도 부모 없는 고아처럼 살아."

 

라는 아버지의 말이 당연한 것처럼 들렸다. 

처음부터 고아였던 것처럼. 나에게 부모는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또 10년을 살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터널을 아이와 둘이 걷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가끔씩은 그 터널 안으로 빛이 비추기도 했고, 

같이 걸어주는 이도 있었기에, 터널 안이라고 외롭고 무섭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다.  

터널 안에서 칼바람과 비구름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빠에 관해서는 1도 궁금해하지 않던 아이가, 엄마의 아빠에 대해서는 궁금해했다.     


"엄마의 아빠는 어떤 아빠였어?"


아이에게 나의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상처를 갖고 있기 싫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나에게는 신앙이 생겼으니. 용서할 의무와 책임도 있었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발목 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2. 

10년이 지나 아버지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아버지 나예요. 잘 지내셨어요?" 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대뜸 칠순 잔치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도 딸인데 그 정도쯤은 해줘야 되지 않겠어?"


마치 며칠 전에 연락을 주고받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히 칠순 잔치를 요구하는 아버지의 반응에 나는 당황했다. 

뭐지? 이 양반.... 했지만, 이미 나는 용서를 선택했으니까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내 아이에게 할아버지 칠순잔치의 추억은 남겨줄 수 있을 것 같아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이는 13살 때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나는 23년 만이었다.      


하지만 23년 만에 다시 봐야 되는 아버지의 만행은 참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용서하는 것을 보류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딸이 나를 위로했다.      


"엄마, 많이 힘들었겠다. 수고했어. 엄마 잘 컸어. 그런 아버지 밑에서."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것을 위안받았다. 

      

그 후, 아버지와는 다시 멀어졌다. 아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 없는 자유로운 중처럼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10년이 지났다.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된 딸아이가 그동안 모아둔 적금을 깨서 할아버지의 팔순을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왜? 니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그래도 엄마 아빠잖아. 날 낳아준 엄마를 낳아줬잖아."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린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동안 아버지는 많이 늙어있었지만 여전했다. 

음식만 먹고, 용돈만 받고 놀다 가라면서 우리들 곁을 또 훌쩍 떠났다. 

나는 역시나... 화가 났지만 딸이 말했다.      


"우리랑 같이 있어보질 않아서 많이 불편한 거야. 할아버지도."

      

그렇게 우린 다시 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미 내 상처의 흔적은 희미해진 데다 

미국으로 이민 간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고모를 통해 아버지의 불행한 과거 이야기를 들은 후, 

아버지를 가엽게 생각까지 할 수 있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달라져서도 안 될 것 같았다.  


3.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가 치매와 파킨슨에 걸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5년 만이었다.  

나는 예전 아버지가 나에게 보였던 반응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하기 싫어서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외면하고 손 놓고 있었는데, 

아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엄마가 가봐야 하지 않겠어? 

이대로 돌아가신다면 영영 기억을 잃으면 어떡해? 

할아버지한테 그동안 하고 싶은 말 없었어?"

      

없었는데. 생겼다. 할 말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그 말을 아버지에게 해야 될 것 같았다. 

4.

5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요양병원 비대면 면회실. 

마치 교도소 면회실처럼 유리를 사이에 두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분이었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난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뼈와 살가죽만 남은 몸뚱이는 손만 대면 툭 하고 부러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용케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다정하게 바라보고 불러주는 것이. 

하지만 이내 나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감사했다.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구나.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해야 했다. 

그의 기억력이 모두 휘발되기 전에. 

그래서 그가 자신이 행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아버지. 그래도 날 낳아줘서 감사해요. 

비록 날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날 낳아줘서 난 내 딸을 만났어요. 

아버지가 나의 교훈이 되어줬어요. 

아버지 같은 부모가 되지 않기 위해 나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았어요. 

그래서 감사해요. 

내 딸로 인해 난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으니 난 괜찮아요.  

그리고 죄송해요. 

내 딸 같은 딸이 되어주지 못해서. 

그러니 안심해요. 

내 딸과 함께 아버지의 마지막 길은 잘 배웅해드릴 테니까."

     

비로소. 오래된 아픔 하나가 뚝 하니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언젠가, 그 아픔이 떨어져 나간 자리

사랑이 덮어지면, 

아버지 손 한 번 잡아볼 수 있을까. 싶다. 

뭐 못 잡아봐도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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