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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꽃 Dec 28. 2021

낭만은 개뿔

낭만에 대하여는 최백호 씨에게 

선물은 일 년에 딱 두 번. 서로의 생일날과 그리고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에만 한다. 

(스승의 날은 내가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 살아보니 아이만한 스승이 없더라) 

그리고 현금으로만 한다.  

누군가는 그런다. "너무 낭만이 없잖아!!!"

그러면 아이가 그런다.  


"낭만은 무슨 개뿔. 낭만에 대하여는 최백호 씨에게 물어보라고 그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을 낭만이라는 이름의 쓰레기를 만드는 것보다, 현금이 백배 낫다.

는 것이 우리 모녀의 생각. 

우리에게 있어 선물이라 함은 마음보다 현실. 낭만보다는 가성비가 먼저이다. 

그래도 주는 사람 마음인데?

그러니까 원하지 않는 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오죽하겠어!!        


물론, 우리라고 처음부터 현금이 선물이었겠는가?

우리도 여느 애틋한 모녀처럼 낭만적인(?) 선물과 손편지를 주고받았을 때가 있었다. 


아이의 고사리손으로 만든 어버이날의 카네이션,

돼지 저금통을 털어 장만한 크리스마스의 빨간 양말, 

한 달 용돈이 고스란히 들어간 생일날의 영양크림. 

아이가 준 선물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 엄마 사랑해요. 엄마 오래오래 사세요. 엄마 감사합니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비뚤비뚤 정성스럽게 쓴 아이의 손편지를 아직도 갖고 있다. 


나 역시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예쁜 구두. 머리핀. 하늘하늘한 원피스. 마술봉. 마로니 인형을 선물을 하면서 아이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우리도 한때 선물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낭만적인(?) 모녀이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아이의 생일뿐 아니라,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춘. 하. 추. 동 절기마다 이벤트를 만들어 아이에게 책을 선물 하기 시작했다. 

전집들과 저자의 사인본이 담긴 책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주변에 작가들이 많다 보니...)

집 안에 아이의 책들이 점점 쌓여가고, 

그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러던 어느 해, 다음에는 무슨 책을 선물할까? 고민하다가 맨날 저자의 사인만 받아줬는데, 

내가 직접 저자가 되어 아이에게 선물하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래!! 내가 아이를 위해 책을 직접 집필하는 거야.'

 

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이란 말인가!!

그렇게 아이의 열여섯 살 생일 선물이 정해졌다. 

(16살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 아이의 15살 생일날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다행히, 나의 이런 기획의도를 어여삐 여긴 출판사를 만나 일이 진행되었다. 

제목도 당시의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오바마라는 트렌드에 맞춰 열여섯 살 아이의 생일 선물에 딱 맞아떨어지게 지었다.


[열여섯 살 오바마처럼.]     


마침내 아이의 16살 생일에 맞춰서 책이 출판되었다.   

아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그동안 겹겹이 쌓인 낭만의 나이테가 더 풍성해지겠구나. 

우리의 삶은 좀 더 멋스러워지는구나 한껏 기대에 부푼 나는  서점에도 깔리지 않은 따끈따끈한 책을 들고 아이의 생일에 짠 선사 했다.      


"생일 축하해 딸" (어서 엄마 멋지다고 이야기해)

"엄마가 일 년 동안 열심히 준비했어. 온전히 너를 위해서 말이야" (어서 엄마 낭만적이라고 이야기해)     


그런데 책을 받아 든 아이는 땅이 꺼지라 한 숨을 쉰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야.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은 아이에게 빈정이 상해가려는데, 아이는 토네이도 강풍 같은 한마디를 날렸다.      

"세상에 아이 생일날 책을 출간하는 엄마가 어딨어?"

     

이건 빈정이 상한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빈정만 상했으면 좋았겠는데. 

       

"엄마가 있잖아. 얼마나 낭만적이야...."

      

겨우, 입을 연 나는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한 일들이 헛짓이 되면 어떡하지? 불안이 급속도로 나를 덮기 시작했다.      


"낭만은 개뿔."

      

불안한 예감은 왜 빗나간 적이 없는가?     

개뿔이라니... 개뿔이라니... 나의 낭만이 개뿔이라니.      


"다른 엄마들은 딸이 원하는 걸 선물로 한다구. 그게 선물이라구." 

"너... 책 원하잖아"


젖 먹던 힘을 다해 아이에게 원망 같은 하소연을 했다. 

제발 나의 수고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 


"책은 엄마가 원하는 거지. 나 한 번도 책 원한 적 없어" 

      

토네이도 강풍에 이어 이젠 청천벽력이었다. 

나 그동안 뭐한 거니? 낭만이라 믿었던 것들이 진짜 개뿔이었단 말인가?     


"그... 그럼? 뭘 원했는데?"

"용돈!! 앞으로도 계속 용돈일 거야."

      

낭만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보처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실망해서?

아니 아이한테 쪽팔려서. 

내가 책을 집필하는 동안, 누군가가 내 아이에게서 낭만을 앗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동안 힘들게 나의 낭만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선물이라는 낭만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엄마라는 현실이었다. 


나의 눈물에 당황한 아이는 애써 수습을 하려고 했다.       


"이왕 나를 위해 쓴 거니. 고마워. 하지만, 엄마. 

앞으로 생일선물 같은 것 때문에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난 용돈만으로 충분하니까.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이 책은 고맙게 받을 게. 생일 선물이니까 인세도 내 꺼지?"


인세도 내 거지?라는 말로 하마터면 다큐가 될뻔한 상황이 예능이 되었다.         


내 아이 말고 내 주변의 열여섯 살은 모두 읽은 비운의 도서. 

난 아이에게 이 책은 인세로 계약한 게 아니고 매절로 계약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책이 안 팔려서 인세가 들어오지 않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이젠 아이의 생일선물로 현금을 준다. '원하는 거 사'라고. 

아이는 '원하는 걸 사기엔 조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땡큐'라고 말하고, 

'낳아줘서 고마워'라는 말은 카톡으로 남긴다.   

 

그리고 이젠 아이도 나의 생일 선물로 현금을 준다. 

그리고 '태어놔줘서 고마워. 나의 엄마가 되어줘서 고마워.'라는 담백하면서 짧은 고백을 한다.      


그래, 선물이 별거냐. 주고, 받고 기분 좋고, 좋은 기분에 따뜻한 말 한마디 남기는 거. 

그거면 충분한 거지.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거. 그게 선물이라는 것을 열여섯 아이에게 배웠다. 

그래, 낭만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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