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된다는 것
커피 공부를 위해 머물던 마니살레스는 대학교가 많은 교육도시라 콜롬비아에서도 제일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콜롬비아는 안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실제로 2인조 강도를 만난 적도 있다.
하숙집에서 만난 꼬마 산티아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냈다. 어린아이 혼자 밖에 내어 놓기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지인도 마찬가지인 건지 어린 산티아고도 집에서 10미터 이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산티아고가 집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해 보여서 밖에 산책하러 잠시 나간 적이 있다. 어느 날 손잡고 다니다가 귀찮아서 목마를 태웠더니 이 꼬마가 탄성을 지른다.
"캬하하하하하하!!!!"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신기한 느낌이었다. 산티아고의 즐거움이 내 어깨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당시 우리를 바라보던 산티아고의 엄마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산티아고의 아버지가 자주 오지 않아서 그 빈자리가 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숙하는 학생들의 허드렛일 만으로 돈을 벌기가 빠듯했던 산티아고 엄마의 모습은 굉장히 애처로웠다. 때론 주방에서 혼자 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애들을 여자 혼자 키우기가 어디 쉬울까. 첫째인 누나는 사춘기가 오고 산티아고는 돌봄과 교육이 필요한 시기인데 집에만 있어야 하는 이 꼬마 녀석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의 능력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산티아고와 슈퍼마켓에 장 보러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슈퍼마켓 직원들이 산티아고를 내 아들이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은근히 녀석과 많이 닮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 빨고 재미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전 아이들에게 느껴보지 못할 정도의 애정이 내 맘속에 생겼다. 어린아이가 이만큼 사랑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함께할 수 있는 달력 속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게 보이니 얼마나 힘들던지. 그것은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헤어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떠나기 전날 밤 침대에 누워 지난 시간을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격해졌다. 저 귀여운 꼬마 녀석이 앞으로 크면서 겪을 힘든 일은 어떻게 견뎌낼까 걱정이 되곤 했다. 나도 모르게 내 귀에 눈물의 연못이 생겼다.
마니살레스에서의 시간을 돌아보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아빠가 된다면 이런 마음이겠구나.’라는 것. 네 살짜리 꼬마와의 짧은 만남은 내가 콜롬비아 여행에서 가졌던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여행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내가 알지 못했을 감정이다. 그리고 이후 이 감정을 다시 떠올리는데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몇 달 후, 페루 쿠스코를 여행하고 있던 당시 집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절대 약한 말을 한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아프다고 하셨다. 당시 간경화로 두 번이나 쓰러져 입원을 하셔야 할 정도로 아버지의 건강 상태는 심각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내가 이 여행을 지속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다. 의사와의 대화와 고민 끝에 결심했다. 이 여행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간이식을 하는 걸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간이식 공여자로서 검진을 한 뒤 이식 수술 날짜를 며칠 후로 잡았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한국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 거짓말처럼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친척들은 내 몸에 칼을 대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도 했고 어쩌면 날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이 땅에서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얼마 후 돌아가시기 직전의 기억이 났다. 돌아가시기 몇 분 전 아버지의 수술 문제로 당장 전화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당시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심카드를 만들어 놓지 않았던지라 일처리가 늦어 답답해하는 내 모습을 보셨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픈 몸을 일으키시곤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네 달라하셨다. 바탕화면을 열고 가쁜 숨을 쉬며 앱을 순서대로 힘겹게 하나씩 하나씩 누르더니 내게 건네주셨다.
아픈 사람이 안 아픈 사람에 대해 뭘 그렇게 신경을 쓰셨나, 내가 못할 것도 아닌데. 병상에 누워서도 자신 때문에 여행을 중단한 아들에게 미안함과 동시에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을까?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왔고 멀리서 자신을 위해 날아온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다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대화라고 해 봤자 부자 사이엔 별 말이 없었다. 더구나 경상도 남자들끼리.
내겐 아버지와 이 기억이 마지막이다. 며칠간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일상 대화가 전부였다. 여행을 중단할 때만 해도 아버지의 상황을 원망만 했었다. 그러나 병상 곁 아버지의 마지막 3일간을 함께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세계 여행 출발 당시 아버지와는 관계가 불편한 상태였다. 집안 경제적인 문제가 컸고 그로 인해 대화는 특히나 적었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까이서 못 느낀 '아버지로서의 마음'을 여행하며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난 내 아버지 세대의 힘든 시절을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우리나라 전후 시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겪으신 분이셨다. 남들처럼 어릴 적 우리 집도 다르지 않았다. 몹시 가난했다. 집이 없어 공터에 집을 손수 지었고 겨울에 난방은 당연히 되지도 않아 물그릇이 얼어버릴 정도의 냉골에 살았다. 부모님은 갓 태어난 나를 두 분 사이의 온기로 품으며 재웠다. 어떤 분야에 롤모델이 있다는 건 이렇게 다행인 건지 그때 처음 느꼈다. 난 내 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호주 생활을 버틸 롤모델로 과거 더 힘든 시간을 경험했을 아버지를 떠올렸다. 당시의 아버지와는 물리적으로는 수천 킬로 미터, 과거의 아버지와는 수 십 년 떨어져 있었음에도 난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며 견뎌낼 수 있었다.
아버지도 내가 집을 떠날 때 내가 콜롬비아의 산티아고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셨을까? 시간이 지나서 나도 아버지가 보여준 대로 자식에게 작은 부분이라도 본이 되며 살 수 있을까? 내가 100% 헤아릴 수 없는 아버지셨지만 보여주신 삶만으로도 내겐 삶의 에너지였고 깊은 감사 그 자체였다. 그렇게 영원히 나의 편이었던 사람이 하늘로 갔다. 아버지 역시 여행을 무척 좋아했지만 아픈 몸 때문에 십수 년간 가지 못했다. 이젠 새로운 곳으로 다시 오지 않을 여행을 떠났다.
뻔한 스토리에다 과정과 결과를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반응하는 감정마저 100% 컨트롤하기 쉽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역시 실전은 다르다. 내 이야기가 되면 식상한 이야기라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걸. 아버지가 존재만으로 크다는 것을 집에 텅 빈 공간이 며칠간 계속되고 나서야 알았다. 정말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흐느껴 울었다.
흔하디 흔한 표현임에도 그럼에도 너무나 사적인 감정이라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돌아가신 며칠 동안 난 정말 어느 때보다 아버지가 내 곁에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