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최소화의 법칙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요?"
내 자전거와 짐을 본 사람들에게 심심치 않게 들은 말이다. 여행 시작 때와는 달리 호주에서 돈을 벌면서 예산에도 여유가 생겼고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것들을 비로소 시도해볼 수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온 뒤 커피 공부를 하면서 관련 장비들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전체 짐 중 장비 무게와 부피가 늘어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이동하는 속도는 느려졌고 매일의 라이딩에 피곤함은 더해졌다.
자전거 여행의 기간이 연 단위로 늘어나면서 많은 이들이 던지는 질문을 나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데 이 많은 짐을 꼭 다 챙겨야 할까?'
늘어난 짐 때문에 속도는 느려지고 피로도가 누적되면서 생각에 잠겼다. 짐을 줄이는 데 있어서 나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함은 식상해서 새로울 것은 없지만 자전거 여행으로 좁혀 들여다보면 한층 더 실감 난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생각하게 한다.
라이딩 속도, 간편함의 정도, 짐 무게, 자전거 형태 등 몇몇 요소만 바꿔도 자전거의 선택과 짐 꾸리기에서 차이는 상당하다. 자전거 여행자의 입장에서 준비하는 장비와 물품은 당연하게도 일반 배낭여행자보다 훨씬 많다. 자전거만 놓고만 봐도 그렇다. 자전거에 필요한 장비를 챙겨가야 하고 돌발 상황이 벌어질 질 수 있음도 대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펑크가 난다면 어떻게 될까? 자전거 여행에서 펑크가 나면 먼저 타이어의 구멍 난 곳 주변을 찾아 이물질을 제거한다. 타이어와 튜브를 분리한 뒤 펑크 난 튜브 주변을 사포로 문지르고 본드칠을 한다. 그 위에 패치로 구멍 난 곳을 메운 뒤 공기를 넣고 원래의 타이어에 끼운다. 이 과정에만도 무려 튜브, 본드, 솔, 패치, 사포, 분리 레버, 에어펌프 등 예닐곱 가지의 물품들을 필요로 한다.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그렇듯 여행 짐을 꾸리는 것에도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명확한 기준을 잡기 위해 필요와 원함을 두고 구분하라고 한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있지 않아도 되는 것, 필요한 것은 여행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을 가리킨다. 무엇을 챙길까의 질문이 다음의 질문으로 바뀌었다.
'나의 자전거 세계일주 여행 준비에서 뭐가 원하는 부분이고, 뭐가 필요한 부분이지?'
무거운 짐을 줄여 덜 고생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기준을 잡기 위해 여러 번 질문했지만 명확함을 찾아야 한다는 기준 때문이었을까? 여행 중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불확실성 속에서 명확한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에 빠져버렸다.
내가 여행 중 가장 많이 챙긴 부분은 옷이었다. 같은 계절의 옷이 여러 벌 있었지만 난 그것들이 필요했다. 보통 여행자들은 옷의 경우 상의는 3-5벌, 하의 2-3벌 정도를 챙긴다. 나도 시작할 때는 그랬다. 하지만 여행의 방식이 바뀌면서 일반적인 짐 싸기 방법도 내 스타일로 바꿨다. 캠핑을 자주 한 데다 빨래를 못할 경우와 빨래를 해도 마르지 않을 것을 대비해 속옷의 경우 일주일 치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걸 왜 다 챙겨가면 안 되는 거지? 원함이든 필요함이든 뭐든 어때? 왜 가져가면 안 되나?'
여행의 기간이 길어지고 나 자신만의 여행이 되어가면서야 알았다. 남들이 말하는 것들이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게도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결국은 나의 삶에 내가 지고 가는 짐들은 ‘미래의 필요’를 위해 ‘현재 원하고 있는 것’ 임을 아는 게 중요했다. 본인 스스로의 욕구가 명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니까.
'미니멀리즘'이란 단어가 유행하면서 어느새부턴가 많은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소유욕이 많은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정리를 못하거나 너저분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던 이 개념이 여행에도 들어와 어느새부턴가 여행의 방식에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게 퍼지다 보니 이젠 남에게 강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단출하고 단순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멋지게만 볼지도 모른다. 10년 전에도 이름만 달랐을 뿐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는 사람이 왜 없었을까? 그때와 비교하자면 지금은 필수로 생각하던 큰 도구와 장비들은 다기능 소형으로 바뀐 것들이 많아졌다. 또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들로 바뀌었다.
내가 세계일주를 출발할 때는 이 세상에 스마트폰이 갓 나오던 시기였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다기능이 있는 스마트폰 하나로 현재의 삶은 과거보다 훨씬 빨라지고 가벼워졌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여행자들의 짐 꾸리는 것까지 바뀌어가고 있음을 직접 체험했기에 '미니멀리즘'이란 말이 주는 모순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 여행이 그랬다. 이 자전거 세계여행이 제대로 지속하려면 내가 가진 장비 중 가장 중요한 장비는 자전거만큼이나 스마트폰도 중요했다는 사실이다.
물건을 줄여야 속도가 빨라지고 피로도도 낮아진다는 사실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짐을 반드시 덜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며 여행을 할 이유는 없고 난 그렇게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삶이라고 다를까?
자신의 삶에 중요한 가치와 본인의 욕구는 경험이 동반된 이성으로 걸러진다. 원함과 필요함 사이를 고민하다가 멋져 보여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자신의 독립된 여행을 하는데, 주체적인 삶을 사는데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는 삶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 '후회 최소화의 법칙'을 쓴다고 한다. '어떤 일을 두고 고민이 있을 때 자신이 만약 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내가 후회를 할지 생각해 보고 선택을 한다.'는 그의 선택 방법론이다.
겨우 자전거 짐의 이야기로 시작한 삶의 가치 선택을 세계적인 사업가를 빌어 너무 거창한 듯 말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은 인생이고 인생은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다. 과거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나의 모습이다.
자전거 여행에서 짐의 무게는 보통의 삶에서 느끼는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각각의 무게와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전거 여행에서 짐 싸기는 필요와 원함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보다 후회 최소화의 법칙을 따라서 써보고 줄이는 것이 낫다. 고생을 할지 후회를 남길지에 대한 고민이라면 본인의 선택에 과거의 일을 다시 못할 일이라 후회는 하지 않을 테고 후회한다면 미래에 똑같이 겪을 실수는 피할 수 있다.
가방 속 저 많은 짐들은 모두 내게 쓸모가 있었다. 비 오는 데다 춥고 배고팠던 아르헨티나 파나고니아에서의 어느 날 수제비가 되어준 밀가루 한 덩이, 스위스의 고요한 밤 맛없는 홍차를 심폐소생시킨 설탕 한 꼬집, 멕시코에서 땀을 너무 많이 흘려 눈이 부어 떠지지 않았을 때 몸을 회복시켜준 소금 한 스푼 등 가방 속 작은 것들은 모두 때에 맞게 역할을 했다. 마치 세상 사람 모두가 세상의 한 존재로 나름의 역할을 담당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