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을 통해 본 세계관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을 남의 입을 통해 지적받으면 마음이 힘들다. 그러나 현상이나 상황을 통해 넌지시 깨닫게 되면 내 마음도 덜 다치고 반감도 덜 생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여행이라고들 한다. 내가 경험한 세계일주는 살면서 익숙해짐에 따라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과 내가 틀린 것을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을 바라보게 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일상생활에서는 인식조차 못했던 것들이 여행 중 돌발적인 상황 속 고정관념들로 드러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이란은 나의 세계관에 대해 자문하게 만든 여행지였다.
시라즈(Shiraz)에서 멀지 않은 유적지 페르세폴리스로 이동 중 사고가 났다. 차도가 아닌 곳에서 운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차를 세우고 문을 여는 바람에 라이딩 중인 나는 부딪혀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 운전자는 경찰에 신고한다고 해놓고서는 도망가 버렸다. 다행히 미리 찍어놓은 사진 증거와 현장에서 만난 친구 '알리'의 도움으로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 사귀게 된 알리는 자기 집에서 머무르라며 그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날 초대했다.
알리를 제외하고 같은 집에서 지내는 남자는 나밖에 없었다. 남녀 구분이 엄격한 문화라 내가 불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알리네 가족은 외국인인 날 어색해하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우리나라 뉴스에서 본 것을 현지 사람들을 통해 직접 확인한 부분이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란에서 우리나라 드라마 <주몽>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재방도 모자라 삼방까지 했음에도 시청률이 90%대를 기록한 사실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뺑소니 사고를 당해 경찰서 갔을 때도 <주몽>이 방송되고 있었으니까.
놀랐던 부분은 대화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송일국, 한혜진 씨에게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송일국 씨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의 조상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고 있었다. 상당수의 여성들로부터 “주몽 씨는 나의 이상형이에요.”라고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연예인들이 처음으로 부러웠다.
특히 옆에 현지 남성이 있을 때와 없을 때 말하는 느낌과 강도는 많이 달랐다. 너무너무 달랐다. 그걸 직접 보고 아무런 느낌이 안 들 수가 없을 정도로. 큰 눈 속 강렬한 눈빛으로 말하는 모습은 수줍음을 넘어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사랑을 갈구한다는 단어를 연상케 할 정도였으니까. 평소 연예인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음에도 이때만은 있는 척했다. 드라마를 구실로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한 층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 난 내 사진과 경험을 통해 그들이 쉽게 나갈 수 없는 외국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들은 그들이 몸 담은 이란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바람난 남편에게 맞아 이혼하고 싶어도, 아이를 보고 싶어도 불가능했던 여성,
인터넷을 통해 접한 콘텐츠를 보고 외국으로 나가고 싶은 학생들,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싶어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고 싶음에도 남편이나 아버지 등의 보호자의 허락 없이는 절대 갈 수 없는 능력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정과 미움을 동시에 갖고 있음을 봤다.
이슬람을 믿는 이란에서는 당연히 술을 금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다리 건너 알게 된 다른 친구와 함께 밀주를 마신적이 있다.
나 : 그런데, 이란에서는 특히 무슬림들은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냐?
친구 1 : 괜찮아. 알라께서 용서하실 거야. 사실 난 꾸란에서 말하는 대로의 알라라고 생각하지 않아.
함께한 다른 친구 한 명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친구 2 : 신이 술 마신다고 벌을 준다고? 벌은 경찰이 주는 거지. 난 알라를 믿지만 술 마신다고 해서 벌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작은 행동을 두고 왜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행동마저 규정하려 들지? 이상하지 않아?
어쩌면 그들을 제 멋대로의 종교관을 가진 사람이라 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 그들은 동의하지 않는 행위를 규정하는 이란의 종교 시스템에 대한 거부로 보였다. 튀르키예에서 경험한 술과 클럽까지 오버랩되었으니까.
대화 중 화제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겪는 남녀 사이의 연애 문제로도 넘어갔다. 나였으면 보는 사람이 있어서라도 엄격하게 행동했을 텐데 이들은 외지인 앞에 보여주기 식이 아닌 자신이 믿는 가치대로의 모습을 보였다. 하긴, 사회에서 금지하는 술을 마시는 것, 연예인이든 정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든 좋아할 수도 있는 것 자체가 인지상정 아닐까? 이들도 욕망을 가진 사람인데.
엄격한 종교 때문에 내면마저 딱딱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생각을 들었을 때 내 고정관념과 엄숙주의를 봤다.
입으로 말하지 않지만 내가 품고 있었던 고정관념 '무슬림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알라가 보고 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등의 삶의 행동거지를 규정하려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의 세계관이 보였다. 거기엔 30년 넘게 살면서 만들어온 종교관, 물질관, 정치관, 인간관 등이 옳다고 악을 쓰며 증명하려는 내가 있었다. 10대, 20대에 철없이 하던 모양처럼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고 있었다.
이란을 여행하며 주로 받은 느낌은 감사와 반성이었다. 이란에 비해 우리나라의 삶의 질, 우수한 사회 시스템, 정치와 종교에 속박되지 않은 자유는 압도적이다. 이 사실로도 우리나라가 너무 좋았다. 다른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을 면을 상하지 않고 나의 잘못된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책으로만 봤다면 이때 느낌은 글로 남길 정도의 깨달음과 반성으로 절대 못 미쳤을 거다.
이란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의 부실한 세계관이 보였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고 오기로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현재 이란의 모습이 어려운 것이 잘못된 그들의 국가 시스템과 강압적인 종교의 탓으로 지적하고 싶었던 걸까? 왜 나는 나의 심적 불편함을 가치 대결로 놓고 상대에게 안 그런 듯 젠체하며 이기려 가르치려 들었을까? 이들이 손님인 내게 보여준 관대함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는데 정말 속 좁고도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날 봤다.
내가 타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타인의 존중 없이는 나의 존중도 없다. 서로 다른 이들의 공존을 위해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은 내겐 낯선 종교 이란의 이슬람을 짧게 겪으면서 실감했다. 그것은 인터넷에서 본 감상 따위가 아닌 경험이자 체감이었다. 이란 친구들은 타 종교를 믿는 나를 존중해 줬다. 솔직히 스스로가 많이 부끄러웠다. 이란 친구들은 나의 속마음을 알았을까?
이란은 일부 이슬람의 무자비한 방식처럼 내 마음을 팩트 폭행하지 않았다. 대신 이슬람 문화 속 손님을 맞이하는 관대함처럼 나의 생각을 넌지시 일깨워줬다. 고마움과 동시에 나는 내가 몹시도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