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했지만 경험에만 빠지지 않기
세계일주 여정의 종착지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서였다. 수도인 리스본 중심가, 붐빌 것만 같았던 코메르시우 광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과거 해양왕국으로 세상을 호령한 시기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의 화려한 건물들이 있었지만, 경제위기 때문인지 내가 방문한 때의 포르투갈은 흐린 날씨만큼이나 우울한 느낌이었다.
쇼핑몰이 있는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오가는 사람은 적었고, 골목은 잿빛 하늘처럼 무채색 칙칙함을 머금고 있었다. 한 때의 영화로운 시기는 항상 영원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붐빌 것 같았던 여행자 숙소는 한산했다. 연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사람들을 제외한 소수의 여행자들만이 삼삼오오 조용히 테이블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며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이 여정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혼자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여행 중이었음에도 지난 크리스마스와 연말엔 꼭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쓸쓸함이 유독 더 느껴지는 날 기대하지 않게 시간을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좋은 날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슬픈 사실이 먼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함께한 멕시코의 가족 같은 친구 다니엘의 어머니와 이란의 알리 어머니가 하늘로 가셨다. 함께 야한 농담을 하며 낄낄대던 콜롬비아의 하숙생 친구는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이 여정의 끝에서 부고를 접하며 이젠 추억 속에서만 떠올릴 그들의 추억과는 별개로 여행을 떠났던 이유 중 하나, 다시 한번 사람의 목숨과 천수를 누린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상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잘 만든 드라마처럼 이 여정을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행 후반부로 갈수록 몸과 마음이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내적으론 호기심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예전 괴롭혔던 외로움은 사라졌지만 심심함은 오히려 부풀어 올랐다. 기침이 토악질 나올 정도로 심했고 몸은 나빠져 있었다.
에너지가 차오르려면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꼭 와보고 싶은 곳을 보고도 심드렁한 모습만 가득했다. 나의 대부분 반응은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이런 내 모습에 오히려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도 신경 쓰여 몸과 마음에서 쥐어짜내는 에너지 고갈은 그야말로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여행자의 모습을 내려놓고 쉴 때를 지금으로 잡았다. 자전거 여행 특성상 길 위에서 뭔가를 하고 싶어도 환경적인 이유로 시간을 내지 못한 때가 많았고 쫓기지 않는 환경에서 진득하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 보고 싶기도 했다. 관성대로 여행을 지속하는 것이 사실 더 쉬웠지만, 나는 다시 한번 이 여행을 시작할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시작할 때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멈추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간 열심히 달려온 것에 대한 후회 없음과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여행의 지속보다 컸다.
호주에서의 마음과 같았다. 큰 욕망으로 작은 욕망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난 자전거 안장에서 비로소 내려왔다. 그렇게 세계일주를 포르투갈에서 마무리했다. 짐 꾸리기를 마치고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가요?"
"한국으로 갑니다. 집에 가요."
"크리스마스를 포르투갈에서 보내고? 새해는 집에서 보내려나 보오."
"네,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집으로 갑니다."
"짐이 많은 걸 보니 오랫동안 다녔나 보군."
"돌아보니 많이 길었습니다."
"긴 시간 피곤했겠네."
"이제 가서 좀 쉬어야죠. 크리스마스고 연말이라 저녁엔 택시가 별로 안 보이던데 아저씨는 오늘 저녁에 일을 하시네요?"
"포르투갈 경제가 안 좋아서 저녁까지 좀 더 일을 해야 해."
택시비가 10유로 정도밖에 안 나왔지만, 50유로를 내고 잔돈은 전부 팁은 아저씨에게 그냥 줬다.
"아저씨, 늦었지만 펠리스 나타우(Feliz Natal)! 저는 이제 집으로 가는데 이 돈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이 여행에서 무사히 안 죽고 살아서 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이 여행을 잘 마무리하는 기쁨만큼 아저씨도 행복하길 바라요."
택시비의 몇 배나 되는 큰 잔돈을 여유롭게 팁으로 주는 내 모습을 보며 여행 초반을 떠올렸다. 돈이 없었을 때는 생각과 행동이 비루했는데, 지금은 한결 나아졌다. 그땐 돈 문제가 정말 컸다. 중국에선 신발 살 돈을 아끼자고 구멍 난 곳을 기워서 다녔다. 그땐 구걸하러 온 거지조차 내 신발을 보고 그냥 가버렸다. 잠비아에서는 볼펜을 달라는 아이들한테 한 자루밖에 줄 수 없어 선착순인 셈 치고 바닥에 놓았다. 페달을 밟고 달리는 와중에 뒤를 보니 아이들이 볼펜을 차지하려 맨발로 뛰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심적인 여유가 생기고 보니 드디어 현재와 앞으로의 구체적 모습을 계획하게 된다. 돈이 있어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며 목표를 잡는다. 시간과 건강 그리고 이것을 들여서 만들어야 할 모든 것들이 그렇다. 남들은 이미 다 풀고 간 문제를 나는 이제야 시작한다.
여행 막바지에 들어서도 내가 별 성장을 못했다는 자책을 했다. 인생에서 속도가 중요하냐 방향이 중요하냐를 두고 꼭 어느 것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를 보았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있었지만 다시 거기에 갇힌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덕분이라 생각했는데 지나온 과정을 살펴보니 여전히 옛날 틀에 포장지만 갈아놨음을 알았다. 이렇게 발전 없는 나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면을 찾자면 조금은 여유로워진 사람이 된 것 같다. 전혀 예상 못한 경험이 이어지고 이어져 무려 8년이 넘는 시간을 여행자의 마인드로 살았다. 남들과 똑같이 살기보다는 20-30대를 여행이란 추억이자 열매로 가득 채웠다. 이 여행을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사람에게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때를 안 기다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 생각엔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정확한 때를 '판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때를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 개인의 역량이다. 그리고 그 역량은 지난 8여년의 시간 동안 여행이 가르쳐준 '경험'이라 생각한다.
삶은 수학처럼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기에 그 선택의 결과와 책임을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 이 뻔하디 뻔한 것을 알기 위해, 그리고 미래에 좀 더 즐겁고 행복하고 싶어서 난 정말 열심히 두 바퀴를 굴렸다. 그것이 내겐 이 자전거 세계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