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카라반, 바다의 항해자
여행 초반 같은 호기심이 거의 사라지고 있을 무렵 나름의 재미를 준 지역이 있다. 내게 지중해 지역은 중세시대 아프리카와 유럽의 나라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곳이다. 그 이유는 의외로 컴퓨터 게임, '대항해시대' 덕분이다.
내 연배의 사람이라면 세계지리 공부를 책 보다 이 게임으로 한 사람이 많을 터.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컴퓨터 앞에서 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자발적인 공부를 재미있게 한 적이 있었을까? 특히 지중해를 낀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곳의 모습이 궁금했었다. 물론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 어떻게 다를까 하는 궁금증도 컸다.
책이나 영상으로 봤던 또는 언젠가 듣고 잊었던 이야기의 장소를 호기심을 넘어 자신의 의미로 만드는 사람이라면 실제 여행지에서 보는 그곳과 지난 모든 수고는 자신에게 특별함이 된다.
좁디좁은 지브롤터 해협 하나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이 나뉘고 지중해와 대서양이 나뉜다. 아프리카는 다시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아프리카는 특정 지역의 나라들을 구분하는데 그 이유를 쉽게 느낄 만큼의 아래쪽 국가들과 분위기 차이가 상당하다. 위성 지도만 봐도 과거 로마제국은 더 이상 남진하지 않고 아프리카 북부 쪽만을 점령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로 지형적인 이유인 사하라 사막이 큰 장벽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에 비친 사하라를 눈으로만 담고 싶지 않았다. 과거 이곳을 오가던 사막의 카라반들의 모습이 궁금했고, 현재 낙타를 타고 사막을 다녀오는 관광객들의 모습과 짐의 규모와 행렬의 수만 차이가 있을 뿐이기에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
수단, 이집트와 튀니지를 거쳐오면서 사하라 사막을 보고 왔지만 내가 상상했었던 느낌은 아니었다. (참고로 사막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래만 가득한 사막이 있는가 하면, 모래가 아닌 그냥 맨땅의 황무지만 있는 곳도 사막이라고 부른다. 사하라는 전부 모래만 가득한 곳이 아니다.) 내가 기대하는 사막 여행을 위해선 모로코로 가야 했다. 두 바다(지중해와 대서양)를 접하고 있으면서 평균 고도 3300미터가 있는 아틀라스 산맥, 게다가 사하라 사막까지 끼고 있는 모로코는 3가지의 뚜렷한 지역적 특성이 있는 나라다.
걸어서 1분이면 닿을 수 있는 모래사막을 끼고 있던 하실라비드(Hassilabied)를 사하라 여행의 목적지로 정했다. 많은 건물들의 외형은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었고 이 가옥들의 집합체는 도시라고 부르기엔 초라할 정도의 규모였다. 역설적이게도 가꾸어 놓은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척박했던 사막 환경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한 연유로 이곳은 나 같은 관광객들이 사하라 투어를 맛보기 위해 오는 여행자를 위한 도시가 되었다.
모래사막 내에서 바람결에 피부로 날리는 모래의 느낌과 주변 소음, 냄새 등 모든 것이 궁금했다. 도착하자마자 1박짜리(만 24시간이 안된다.) 사막 투어를 다녀왔다.
말로만 듣던 사막의 가혹한 심판자 태양은 내가 간 날에도 가차 없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낮에 내리쬐는 볕은 그렇게 뜨겁더니 오후가 되고 모습을 감추어 갈 때면 사막을 진한 오렌지 빛으로 물들여놓았다. 낮의 열기는 모든 습기마저 빨아먹을 것처럼 느낄 정도로 강렬했는데 밤이 되니 냉기가 대낮의 강력한 존재를 기억 안 날정도로 지워버릴 만큼 추웠다.
하루도 안되어 말로만 듣던 사막의 변화를 생생하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사하라 사막에서 부족한 상상력의 공백을 넘치도록 채웠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그 시간이 충만하다고 느낀 것은 어릴 적부터 게임을 통해 궁금해하던 내 상상과 현실에 걸쳐있는 사막의 분위기를 꼭 느끼고 싶어서였다.
과거 사막의 유목민이나 대상들은 자신들이 목축을 하며 얻은 치즈나 가죽, 털 등을 낙타에 싣고 몇 날 며칠을 걷고 걸어 큰 도시로 나가 팔았다. 내가 있던 하실라비드에서 대도시인 마라케시까지 왕복 약 1200km 정도다. 과거 국경선이 지금처럼 그어지기 전에는 좀 더 깊은, 현재의 알제리 국경 쪽에서 출발해 2000km 이상의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있었다.
어마어마한 일교차 속 모래로 푹푹 빠지는 길을 넘었다 하더라도 물이 얼 정도로 높은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갈 땐 얼마나 힘들었을까?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게 삶 자체였을텐데 시대를 잘 타고 난 덕분에 겨우 하루치의 경험으로 그들의 삶을 잠시 맛보았다.
스페인 세비야는 중세 대항해시대의 주요 거점도시였다. 실제 위치는 내륙에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륙 도시 간 교통의 중심인 동시에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과달키비르 강과의 연결은 세비야를 국내외적으로 급부상하게 만들었다. 과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지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현재까지 세비야는 교통 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스페인의 4번째 도시로 자리매김해있다.
대항해시대의 주무대였던 포르투갈, 스페인 지역에서 사용된 500년 전 배는 어땠을까? 당시의 가장 좋은 배라 해도 지금의 것에는 감히 비할바 못된다. 최고급 돛이 달린다 한들 현재와 비교하자면 가련한 천조각을 널빤지에 꼽은 느낌이랄까? 과거에 비해 지금의 선박은 첨단 장비로 이루어져서 조작이 쉬워졌고 작동 인력은 줄었고 배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 위에선 과거나 현재나 위험인 파도에 노출된다. (물론 그 위험의 크기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는 있다.)
중세시대 긴 모험을 떠나거나 조업을 위해 멀리 바다로 나간 사람들은 뭍을 떠나면 그때부터 사실상 그들의 인간적인 권리는 육지와 같은 위치에 있지 못했다.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 아래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해야 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버리거나 그냥 바다에 빠트려버리기도 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물과 식량에 손을 대거나, 배 선체를 파손하는 행위 등)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기에 선장의 상벌은 배 위의 질서와 생존을 위해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일들이었다.
배 위에서 만나는 모든 파도는 사람이 좋든 싫든 배에 탄 사람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파도를 만나는 선원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마치 무너지고 있는 큰 빌딩을 화물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피해 가는 느낌과 비슷할까? 자신과 타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삶이 끝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한 생각을 해 보며 당시에 태어나지 않아 고생을 덜 해도 됨에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설명하기 힘든 위기 속 기나긴 뱃일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와 땅에 두 발을 디딘 선원들의 마음은 그 여정을 다녀온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알 수가 있을까. 당시 출항 전 동네의 성당 곳곳에서 뱃사람들이 무사 복귀를 기원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은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마음 깊이 동의되는 사실이었다.
어릴 적 게임으로 세계지리 공부한 곳을 실제로 다녀보면서 21세기를 살고 있어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소들의 방문은 당시 먼 거리를 오간 사람들이 겪은 환경과 그 느낌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유목민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한편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며 돌아온 뱃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보고 싶어서 자신이 지내던 원래의 편안한 그 자리가 그리워 얼른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은 컸을 거다.
사막의 카라반과 뱃사람들이 자신의 고생길에서 느꼈을 마음만큼 나의 감정도 비슷했다. 6개 대륙을 다니며 가보고 싶은 곳은 가 본 뒤였다. 이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고 여정을 마치고 돌아갈 구체적 시기와 장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