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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by 아스팔트 고구마 Oct 05. 2021

내 마음속 소년이 산다

누구나 저마다의 모험이 있다

 계획한 프랑스 일부 지역 여행을 포기하고 3주의 시간을 만들어 영국으로 넘어왔다. 영국 여행의 최우선 순위는 단 한 가지, EPL 직관도 아니었고 세계적 수준의 뮤지컬 공연이나 전시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세계 일주를 출발하기 전에도 있었던 소망 한 가지, 언젠가 영국에 가게 되면 꼭 들러보겠다고 다짐한 곳이 있다. 바로 대학시절부터 좋아했던 작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반지의 제왕과 더불어 유명한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인 C.S.Lewis가 묻힌 곳에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닌 저 멀리 잘 모르는 외국 작가의 무덤에 뭐하러? 


 대학생이 되고 나서 인생에 도움이 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은 바로 책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C.S. Lewis


 20살이 되었을 때 친구가 C.S.Lewis의 작품을 소개해줬다. 루이스는 사람들에겐 작가이자 옥스퍼드 대학 문학 교수로 알려져 있지만 철학적으로 심도 있는 책을 여러 권 펴낸 사상가이자 비평가, 변증가 이기도 하다. 20대에 읽었던 그의 작품에서 이성의 깊이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그의 사상과 철학을 알아갈수록 내게 주는 놀라움은 굉장한 깨달음이었다. 성인이 되면 꼭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멋있었고 세련되어 보였다.


 대학 시절부터 좋아한 작가였었고 만약 영국에 가게 된다면 내가 할 리스트에 당당히 있던 한 가지 소망 중 하나였기에 그가 잠든 곳에 한번 가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죽어서 말이 없는 그 사람, 그가 평소 생활했던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보고 싶었다.


 난 그가 죽은 뒤 고향인 북아일랜드 주도 벨파스트(Belfast)에 묻힌 걸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그가 묻힌 곳은 그가 일했던 옥스퍼드에서 멀지 않았다. (그의 무덤이 그의 고향 벨파스트에 있었다면 700km를 더 달려 그곳까지 갔었을 거다.) 그는 실제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사망 후 인근에 있는 트리니티 처치에 묻혔다.






옥스퍼드로 가는 길, 뚫고가기 조차 힘든 비로 멈춰서야 했다.


 영국 특유의 오락가락하는 비 내리는 날씨는 루이스의 무덤을 가는 날에도 예외가 없었다. 수 차례 멈추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교회로 이동했다. 실제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옥스퍼드 헤딩턴에 위치한 트리니티 처치


 긴장의 심호흡을 한번 내 쉬며 조용히 무덤 주변을 살폈다. 비 온 뒤의 축축함은 교회 건물 틈과 이끼에 있었고 그 무거움은 습한 공기에까지 스며있는 것 같았다. 그 음습함 때문에 죽은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것도 아닌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트리니티 터치 내의 공동묘지. 이곳에 C.S.Lewis와 그의 형이 함께 잠들어 있다.


 루이스의 무덤을 방문하는 사람을 위해 이곳엔 'C.S.Lewis Grave' 라는 안내 표시가 있지만 작게 표시해 놓은지라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무덤 위 이름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덤 위에 놓인 인형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작품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사자, 아슬란이 있었다. 


 영국을 방문한다면 반드시 해 보고 말리라는 20대 때 적어 놓은 다이어리 속 희망사항이 10년이 지나 마침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무덤 곁에 서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창한 걸 기대한 건 전혀 아니었다. 유명한 고인의 무덤에서 특별한 의식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지난 시간 나의 소망이 이끈 마음 때문이라도 뭔가 특별히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C.S. 루이스의 무덤, 그의 형 워렌과 함께 이곳에 잠들어 있다.


 "왔네요. 루이스 씨. 안녕.... 여기까지 오는데 한참... 걸렸네요."


 그의 무덤 앞에서 한참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다. 길게 돌고 돌아 이 시간 그의 무덤 앞까지 와서 지난 8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한 게 겨우 저 혼잣말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는데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20대, 그의 책을 읽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나잇값을 하는 것, 어른이 되는 것, 책임 있는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필요하다고 자각한 것 같다. 동시에 미래에 대한 꿈과 내 세계일주에 대한 소망도 동시에 커가고 있었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의 가장 큰 재미는 대학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보는 일이었다.)



조이와 루이스 


 그가 누워있는 곳에서 그의 삶을 떠올렸다. 루이스는 독신으로 살던 중 영국으로 넘어온 미국인 조이 데이빗먼을 알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친분이 깊어졌다. 이성이 특히도 발달했던 사람, 루이스였다. 그는 그의 감정이 자신의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직시하고 받아들였다. 그 후 2명의 자녀가 있던 조이를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였다. 그때 그의 나이 60살이 다 되어서였다. 결혼 전 루이스는 골수암이 걸린 걸 알고도 그녀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짧은 시간을 둘이서 함께했고 조이 사후 3년 뒤 루이스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 <섀도우랜드Shadowland>로도 알려져 있다.)


 새 울음만이 트리니티 교회의 침묵을 깨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일지 모를 고요함 속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눈물이 났다.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진 않나 싶은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고 있는 내 모습에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답답함과 공허함에 눈물이 흘렀다. 잘 이해되지 않는 눈물의 이유에 다시 웃음이 났다.


 지구 두 바퀴 거리를 굴리고 나서야 얻은 이 느낌이라니..... 밀려온 허탈감은 컸다. 여행을 출발할 당시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길에서 보낸 시간이 이미 8년 차임을 다시 떠올렸다. 외면적으로는 매일 살펴보는 내 모습이 익숙해져서인지 얼굴의 주름살마저 원래의 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내면으로는 나이가 먹어간다는 느낌이 들던 차에, 오늘 이 자리에서 여행 초기에 생각해 보지 못한 내 모습이 보였다.


 간절한 바람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노력과 시간을 들여 자전거 세계여행의 최종 목적지까지 한 바퀴씩 줄여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남들에게는 무모해 보이는 길고 긴 자전거 여행이 새 삶을 한번 더 사는 기회를 만들어 내는 드라마틱한 과정이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그 이유로 경험이 지나온 길을 다시 살펴보게 했다. 그것은 평생 살며 가질 수 있는 한 개인의 추억이라는 표면적인 것보다, 있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한 과거의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항상 거기 있었지만 그냥 지나쳐 온 과거의 '나'라는 아이를 발견했다. 






 

 다음 날, 다시 한번 그의 무덤을 찾았고, 평소 자주 걸었다는 루이스의 이름을 딴 공원에도 왔다.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 분위기 속에서 루이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떠올리며 산책길을 걸었다. 





 공원 한 바퀴를 돌아보면서 번잡한 마음을 살폈다. 이 당시엔 몰랐지만 간절히 원했던 세계일주의 끝이 보일 때 즈음에야 알았다. 어제 발견한 내 마음속 가난했던 소년이 어릴 적 너무너무 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지금에라도 이뤄주고 싶었다는 것을. 목표를 정해놓고 달려간다는 성인의 내 모습이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둘째치고 어릴 적 품었던 꿈을 멋진 이유로 포장해 이뤄주고 싶었나 보다.


 어릴 때 가난해서 못 가졌던 로봇 장난감을 구입하는 어른의 심정이 이런 걸까? 어른이 되어서 발현되는 소망은 어린 시절의 비슷한 욕망에 기인할 수 있다는 말을 루이스의 공원길을 걸어보며 생각해 보게 됐다. 어쨌거나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먼저 나 자신이니까.


 겨우 이것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 하나였다. 남들에겐 시답잖아 보일지 몰라도, 이 사실을 깨닫는데 나라는 사람에게는 지구 두 바퀴의 거리를 달릴 시간과 과정이 필요했나 보다. 그 8년간의 시간은 어쩌면 애써 무시한 내 마음속 꿈꾸는 소년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루이스 또한 그가 어릴 때 손으로 만드는 걸 원하는 만큼 하지 못해서 잘하고 싶었다는데 나도 그랬다. 나도 남들처럼 내 마음속 그 녀석의 원하는 바를 그렇게 이루어 주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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