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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Dec 17. 2023

화가 없는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

아이들과 세 번째 그림책 만들기를 시작했다. 첫 번째는 <어서 오세요! ㄱㄴㄷ 뷔페> 책처럼 14개의 각 자음으로 시작하는 음식 이름을 넣어 만들었다. 두 번째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상장을 꾸미고 하고 싶은 말을 엮어 책으로 만들었다. 세 번째는 <아홉 살 마음 사전> 책을 읽고 10쪽짜리 무지책에 8가지의 감정을 골라 내가 그 감정이 느껴질 때가 언제인지 그림과 글로 꾸며 나타내도록 했다. 제목은 <여덟 살 마음 사전>이다. 예를 들어 ‘행복해’라는 감정을 골랐으면 행복과 관련된 그림책을 한 권 읽어주고 언제 가장 행복한 감정이 느껴지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그 내용을 무지책 한쪽에 ‘행복해’라고 적고 그림을 그리고 내용을 적게 하는 것이다. <아홉 살 마음 사전>에 보면 마음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8가지만 고르기가 무척 고민이 되었다. 밝고 긍정적인 마음이 있으면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도 넣어야 하고 또 아이들이 이해할 만한 마음이면서도 경험이 있을 법한 마음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8가지의 마음을 정했다. 행복해, 화나, 고마워, 자랑스러워, 두려워, 슬퍼, 그리워, 사랑해.


행복한 마음에 대해서는 무리 없이 다들 잘 해냈다. 떠올리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함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 마음인 ‘화나’부터 난관에 봉착했으니...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화가 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의아하여 “화가 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여러 번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한 번도 없는데 억울하다는 반응의 “네! 정말 없어요!”라는 대답뿐이었다. 경우의 수는 많다. 정말 말 그대로 화가 안 났을 수 있다. 화가 나더라도 금방 풀리는 성격이라 기억에 남아 있는 화가 별로 없을 수 있다. 긍정적인 성격이라 모든 게 오케이여서 화가 안 날 수도 있다. 화가 난 적이 있지만 이걸 기록으로 남겨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수 있다. 화가 난 것을 선생님께 말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 화가 난 대상이 선생님이어서 말하기 곤란할 수도 있다. 화가 난 대상이 친구인데 사이가 나빠질까 봐 걱정돼서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화가 난 적이 없다는 말이 절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고요한 너의 마음이 너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40년 인생을 지나오며 마음속에 조금씩 쌓이다가 고여버린 화가 있다. 그런 화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려 해도 바뀌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대부분은 관계에서 오는 것들이다. 때로는 더러운 세상을 향한 것도 있다. 내 인생도 다섯 등분으로 쪼개면 처음 한 조각은 때 묻지 않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머지 8할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생 선배로서 아이들에게 바라기는, 앞으로 겪게 될 여러 가지 화가 나는 일에 대해 스스로가 덜 힘든 방향으로 잘 풀어내는 지혜를 가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런 건 결코 학교에서 다 배울 수가 없고 다 가르칠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의 화난 감정을 억누르며 모르는 척하지는 말기를, 불의 앞에서는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 가기를 괜한 노파심에 말해주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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