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된 후로 수업 중에 항상 전전긍긍 노심초사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가족에 대해 가르칠 때다. 요즘은 그래도 학년성에 맞게 가족의 다양성을 언급할 수 있어 편견을 깨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데 그래도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이 힘들지는 않을지 걱정이 없을 수는 없다.
아빠가 사고로 일곱 살 때 돌아가시고 여덟 살에 모자 가정을 지원하는 사회복지기관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너무 어려서 슬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모자원에 살면서 많은 챙김과 사랑을 듬뿍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받고 미군부대 카투사들에게 영어 공부도 배웠다. 방학이면 모자원에 사는 가족들 다 같이 관광버스를 타고 바닷가나 대전 엑스포, 서울랜드 같은 곳에 항상 갔기에 아빠 없는 서러움을 느낄 일도 없었다. 그리고 같이 사는 이웃 주민들이 모두 아빠가 없는 사별 가정이었으니 가족의 부재에 대해 큰 편견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5학년 때의 일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와 다툼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눈으로는 나를 쳐다보며 다른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아빠 있어? 보라는 아빠가 없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한 그 말에 나는 가족의 부재가 놀림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교직에 들어오고 난 후로 집안 형편이 넉넉하고 공부도 잘하는 그런 아이들이 아니라, 한부모 가정 아이나 이혼 가정 아이, 가족의 돌봄을 넉넉히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많지는 않아도 해마다 두세 명은 꼭 그런 아이들을 만났다. 이런 교육 환경에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 고생 끝에 겨우겨우 교사가 된 나의 이력은 교사로서는 강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 없이 자랐지만 삐뚤어지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가족사진으로 수업하는 날 당장 편견 어린 우리 반 아이의 발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미 말은 아이의 입을 떠나버렸고, 당장 말을 들은 아이의 안색을 살핀다. 생각해 보면 가족의 다양성을 교육했더라도 실제 아이들의 관계 사이에서는 오가는 말을 조심해 주기를 당부하는 것 외에 또 할 수 있는 게 크게 없다. 싸우라고 교육하는 게 아닌데도 학교 폭력이 발생하듯 가족에 대한 다양성을 교육하는데도 차별에 대한 발언은 늘 가까이 도사리고 있다. 들은 아이가 상처받지 않았기를. 그래서 나는 학기 초 어느 수업 시간에든 내가 아빠가 없이 자랐다는 것을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알리는 편이다. 네가 엄마가 없더라도, 아빠가 없더라도 절대 주눅 들고 기죽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