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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책방 Apr 20. 2024

낯선 꿈

짧은 글

3일째 똑같은 문을 열고 있다. 시립병원을 지나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지금은 사라진 용두동 한옥거리가 보인다. 그곳에서 세 번째 골목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막다른 골목이 나온다. 그 골목의 마지막 집의 문을 밀면 안쪽으로 열린다. 문이 열리면 작은 사각형의 마당이 보인다. 천장은 뚫려있고, 벽의 문들은 굳게 닫혀있다. 뚫린 천장에서 들어오는 바람에는 비린내가 진동한다. 아마도 누군가의 집에서 생선을 굽고 있는 듯하다. 정면에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나무문인데 반쯤 아래는 막혀있고 반쯤위는 불투명한 창이 있다.


 나는 3일째 이 문을 열다가 잠을 깼다. 문을 열었는지 못 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에서 깼다. 오늘은 꼭 들어가고야 말 것이다. 침착해야 한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손잡이를 잡고 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으윽 하는 소음과 함께 문이 드디어 열렸다. 집중해야 한다. 여기서 잠을 깰 수는 없다.


문너머에는 양쪽으로 방이 있다. 오른쪽 방은 불이 꺼져있고. 왼쪽 방에는 불이 켜져 있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고 문지방을 넘었다. 나무로 된 마루는 방금 닦아둔 것처럼 반짝이고 있다. 이곳이 거실인 듯하다. 창문은 보이지 않고, 그 흔한 소파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빈 공간에 작은 요강하나가 보인다. 다가가 발로 툭 쳐보니 안에서 출렁임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일을 본 거 같다. 


먼저 불이 켜진 왼쪽방으로 갔다. 아까 문을 열 때와 같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쩌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미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은 역시나 가볍게 열렸다. 왼쪽 방에는 오래된 자개장이 보이고 낮은 침대가 놓여있다. 방금까지 누가 누워있었던 것처럼 이불이 흐트러져있고, 베개는 아무렇게 던져져 있다. 그리고 작은 화장대가 있고, 투박한 행거가 있다. 화장대에는 한 번도 써보지 못한듯한 화장품이 뚜껑만 열려있다. 행거에는 옷은 걸려있지 않다. 대신 그 위에는 무엇을 닦은 듯한 더러운 수건 몇 장이 결려있다. 가까이 가보니 냄새가 진동한다. 오물인 듯했다.


그때 구석에서 쉭쉭하는 소리가 난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담은 가습기가 힘겹게 김을 내쉬고 있다. 나는 가습기를 껐다. 적막한데도 더 적막하다. 이 방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적막함안에 다급함이 흘렀다. 무슨 볼일이 그렇게 급했는지, 왜 그리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는지 알려주듯이. 

이 방의 주인은 오래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나도 서둘러 왼쪽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불이 꺼진 오른쪽 방으로 갔다. 똑같이 문을 두드리는 의식을 치르고 문을 열었다. 문은 뻑뻑했다. 힘을 주고서야 문이 열렸다. 문을 여니 짙은 기분 나쁜 어둠이 보였다. 그리고 불을 켜기 위해 벽을 더듬었다. 손에 스위치가 만져졌다. 스위치를 올리니 불이 켜졌다. 불은 노란색 벽등이다. 노랑벽들이 비친 방은 책장으로 가득 차있다. 이곳은 서재가 분명하다. 아니 서재였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책장에 책은 단 한 권도 없기 때문이다. 이방에 살던 누군가도 오래전에 떠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책을 소중히 여겼나 보다. 많은 책장의 책을 모두 가져갔으니 말이다.

오른쪽 방은 외로움이 흐른다. 그래서 떠났나 보다. 그래서 모두 가져갔나 보다.


나는 방을 나와 마당의 계단에 앉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다. 생선 굽는 비린내만이 여전히 떠다니고 있다. 인기척을 내려고 헛기침을 해봤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맞다. 이곳은 꿈속이다. 꿈속에서는 기침을 할 수 없는가 보다. 나는 깊은 고요를 참지 못해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드는 거 같았다. 꿈인 거 같기도 하고, 현실인 거 같기도 했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관문 옆의 작은 손님방이었다. 나는 방문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방안에서는 “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 문을 열었다. 나는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사람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방안에는 내 나이쯤 보이는 남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있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소리 나지 앉는 헛기침을 해댔다. 그때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닮았다

남자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나는 대답했다.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 집에 들어와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말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조금 늦은 같군요.

-어쩌겠습니까. 이제 모두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요 익숙해져야겠지요


이방도 방은 적막했다.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꿈밖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꿈속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자개장, 책장, 침대, 행거, 화장대, 생선 굽는 비린 냄새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남자 혼자 남은 이 집까지 말이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연다. 검은 비닐로 꼭꼭 챙겨둔 음식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검은 비닐을 하나씩 풀자 음식들이 나온다. 냉동 멸치, 냉동 생선, 냉동 돼지고기, 냉동 찌개, 냉동 야채까지.. 나는 이집에 살던 누군가가 끊여놓은 보리차를 들이켰다. 걸쭉하면서도 특유의 쉰 맛이 느껴진다. 내가 잠을 깰 때면 항상 냉장고 문을 열고 벌컥벌컥 마시던 그 보리차다. 그런 특별한 용도의 보리차가 이 집에 남아있다. 집을 떠나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온기 같았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 방은 따뜻하고 고요하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고요함과는 다르다. 낯설지가 않는다.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기척을 느낀 보리가 슬그머니 내 배위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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