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햇살과 바람을 그림에 담아서

미술 시간

by 바람풀

투명한 봄 햇살에 속살이 간질간질하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찬란한 꽃들로 가슴이 일렁인다.

화양계곡길을 에둘러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

말랑하고 보드라운 숲을 가르며 연둣빛 새순을 닮은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한순간 휙 지나가 버리는 이 계절을 놓칠 순 없지.

바람과 햇살이 유난히 좋을 날이면 미리 계획해 둔 수업은 접어두고 밖으로 나간다.


"얘들아, 오늘은 운동장에 나가서 그림 그리자."

"와아아~~~ !!!!!"


예상대로 아이들의 함성이 뒤따른다.

흙바닥에 뒹구는 차돌같이 단단하고 콸콸 흘러넘치는 계곡물처럼 싱싱한,

단전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우렁찬 함성이다.

KakaoTalk_20250417_102256266_02.jpg 나무와 아이들, 내가 좋아하는 말들



"밖에서 그리니까 너무 좋아요. "


가람이가 정자의 너와 지붕을 그리며 말한다.

꼼꼼한 가람이는 벽돌 쌓는 장인처럼 너와 지붕을 한 장 한 장 섬세하게 그린다.

맞은편 언덕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던 민준이가 나를 부른다.


KakaoTalk_20250417_102256266_01.jpg 날 동화 속으로 훅 데려가곤 하는 민준이


"선생님, 이거 육상 플라나리아예요. 이거 사진 찍어주세요.

찍어서 네이버에 올려야 해요. 이 아인 제 친구예요. 여기 있는 친구들처럼요.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키울 거예요"


돌멩이 밑에서 발견한 플라나리아에 홀딱 빠져버렸다.


"이거 보세요. 얘는 끈적끈적해요. 아, 제 친구가 사라졌어요.

어디 갔지? 「강아지를 찾습니다」라고 벽에 붙이는 것처럼 얘도 붙여서 찾아야 해요."


"플라나리아는 자기가 사는 곳으로 갔어. 대신 네가 그리는 풍경 속에 그려주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이제 그림을 그릴게요."


"너도 정자를 그릴 거니?"


"정자는 남자가 여자한테 들어가 아기를 태어나게 하는 세포 아닌가요?"


"앗, 그러네. 말이 똑같네. 한자가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알려주세요. 이 순간이 되게 행복한 거 같아요. "


"뭐가?"


"미술선생님이랑 밖에서 이렇게 그림 그리는 거요. 곤충이나 벌레도 볼 수 있고."


열 살 아이의 고백에 난 고요히 행복해졌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돗자리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리는 아이,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올리고 그네에 앉아 어딘가를 한참 응시하는 아이,

민들레와 제비꽃이 흐드러진 언덕 위에 앉아 600살이 넘은 느티나무를 그리는 아이.....

자연과 하나 되어 그림에 몰두한 아이들 모습이 꽤 진지하다.

몸에 닿는 햇살과 바람의 감촉, 냄새와 소리까지 모든 감각이 열리는 시간.

다음 주에도 나의 어린 예술가들과 밖으로 나가야지.


KakaoTalk_20250417_102256266.jpg 600년 된 느티나무가 백 년을 훌쩍 넘은 운동장을 지키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