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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Feb 03. 2022

아버지의 아버지


 밤 12시. 온 세상이 눈을 감을 시간이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내게는 한창인 시간. 역시 내 몸뚱이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손과 눈은 대낮이다.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따라 움직이는 손과 눈. 기계적인 터치에 반응하던 화면에 익숙한 모습이 걸어 나온다. 대충 얹어 놓은 검은 머리, 송충이 눈썹, 뭉툭하게 튀어나온 볼, 빨간 티에 노란 반바지를 입은 짱구다. 그는 자기 또래의 아이에게 아빠라 부르며 떼를 쓰고 있었다. 당황한 아이가 옆에 있던 부모를 불러보지만 아이의 부모는 뒤로 돌아 떠나기 시작한다.


 아이는 그런 부모를 쫓아가려 했지만 자신을 잡는 짱구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곧이어 아이를 넘어뜨린 짱구는 아이의 신발을 벗긴 후 아이의 코에 가져다 대었다. 고약한 발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아이의 머릿속에서 잊혔던 추억이 흘러가기 시작한다.





 자전거를 태워주시던 아버지의 넓은 등판


 첫 사랑

 이별

 취업

 회사 생활

 결혼

 자식과의 첫 만남

 가장의 무거움

 집

 뒤에 짱구를 태운 자전거


 아버지의 자전거에 탔던 아이가 자식을 자전거에 태운 어른이 되기까지... 아이는 자신이 짱구의 아버지이자 신형만임을 깨닫는다. 신형만은 이제야 소중한 자식을 감싸 안으며 눈물 흘린다.





 이 장면은 애들 보여주러 갔다가 부모들만 눈물 흘리고 돌아왔다는 ‘짱구는 못 말려 극장판 - 어른제국의 역습“의 명장면 ’히로시의 회상‘ 부분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경제 불황이 도래한 이후 호황기였던 버블 경제 시기를 그리워한 일본인들을 배경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지만 더 나아가 과거, 부모님, 추억 등을 건드리며 감성을 자극한다.


 새벽 감성이 충만한 시간에 이런 영상을 보고 있었던 탓일까? 내 속에 숨어있던 감성이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신형만 위로 아버지가 대입됐기 때문이다.


 신형만의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떠나는 부모의 뒷모습을 아버지는 본 적이 있으실까? 이제 너의 짐은 네가 짊어져야 한다는 듯이 말없이 떠난 부모가 보고 싶지 않으실까? 아버지도 가끔 그리움에 빠지실까?


 그렇게 그날 밤은 아버지에 대한 수많은 사색이 덮쳤으나, “아버지께 여쭤봐야지”라는 결론을 내리며 잠에 들었다.




 그 주 주말, 늘 그렇듯 고향인 하동에 내려갔다. (당시는 내가 대학생이었던 2019년이다.) 역시나 아들이 내려왔다고 삼겹살에 소주 3병을 꺼내 오시는 아버지. 나 또한 자연스럽게 소주잔 2개를 세팅하며 불판에 고기를 얹기 시작했다. 소주 3병이 거의 다 비워질 때 그날 밤의 사색이 기억나 아버지께 조심스레 여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안 보고 싶으세요?”

“당연히 보고 싶지.”

“언제 가장 보고 싶으세요?”

“산에 올라갈 때? 우리 한 잔 더 하자.”


 이미 취기가 오르신 아버지가 새로운 소주병을 따고 술잔을 가득 채우셨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꺼내기 시작하신다.





 “예전에 엄마랑 부산에 살림 차렸을 때.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집들이 오신 적이 있거든. 그때 할아버지께서 맥주 한잔하자고 하셔서 따라 드렸었는데…”


 내가 갓난쟁이였을 때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반신마비 진단을 받으신 할아버지. 내 기억에서의 할아버지는 항상 누워계셨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었고 항상 어머니의 똥 수발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너희 엄마를 진짜 이뻐했는데…”


 아버지 입에서 재생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건강했던 시절이었다.


 “어렸을 때 마당에 있던 큰 감나무 기억나지? 할아버지가 그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서 너희 엄마한테 먹으라고 가래떡이랑 줬거든…”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상. 소주병은 점점 가벼워져 간다.


 “너희 할아버지도 술을 좋아하셨는데…”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08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산소는 현재 대봉감이 빼곡히 심어진 우리 집 산에 있다.


 “우린 다 닮았네요.”


 아버지는 산에 오르실 때마다 할아버지를 만나셨을까? 아버지의 회상이 이어질수록 여러 의문이 피어났지만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계속 꺼내시는 아버지를 보니 마치 내가 짱구가 된 느낌이었으니까.


 “한병 더 들고 올게요.”


 사계절 내내 산을 오르내리시는 아버지. 그는 내 생각보다 더 자주 더 깊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계셨나 보다. 그런데도 말없이 떠난 부모의 등을 바라보며 자식들을 끌어안고 계시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계속해서 소주잔을 가득 채우셨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마주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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