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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쿠키 Nov 25. 2021

아빠의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엄마를 발견했다

당연한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 꼬박 한 달 째다. 두 돌을 앞둔 둘째가 한 시간마다 깨던 신생아 시절로 회귀한 탓이다. 20개월을 살고 보니 세상 빛 처음 보던 지난날이 그리워진 것은 아닐 테고 첫니가 늦어져 뒤늦게 줄지어 올라오는 치아가 불편한가 싶었다. 다행히 아기는 날이 밝으면 컨디션이 돌아오곤 했다. 문제는 나였다. 밤잠으로 충전하던 에너지가 고갈되니 점점 낮에 맥을 못 추기 시작한 것이다. 눕고 싶다는 집념 하나로 친정집을 찾기는 처음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소모되는 체력은 정신적인 부분이 육체적인 부분에 결코 못지않았다. 더욱이 둘째는 내가 잠시만 멍 때려도 사고가 나는 개월 수라는 것 매일같이 증명해 주었으므로. 고로 말고도 보호자가 더 있다는 정신적 해방까지 맞물려서 진정 꿀잠을 아니 기절을 체험하고 일어난 것 같다. 거실로 나와보니 식사 준비하는  엄마만 보이고 아빠는 밖에 나가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셨다고 . 돌아온 정신줄로 나도 나가서 벤치에 앉아 아빠가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바라봤다. 오 이제 제법 손주 둘을 둔 할아버지 폼이 난다. 오묘한 감정이 흐르려순간 벤치에 놓인 아빠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저장된 이름은 '처 마누라 집사람 배우자' 액정에 떠있는 참 의아한 이름이다. 뭘 이렇게 써놨느냐 웃기다며 핸드폰을 전달했다. 아빠는 엄마와 통화를 마치고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응 아빠가 혼자 있다가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누가 연락처부터 확인할 때 엄마를 뭐라고 검색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네 가지 버전으로 다 써놨지"하고는 쿨하게 애들을 쫓아간다.  아... 웃자고 건네고 웃으며 돌아온 말인데 이제 하나도 웃기지가 않다.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임을 들킨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날 밤은 '거리두기'라는 단어에 막혀버려 발길이 안 떨어졌다.


솔직한 마음을 꺼내놓자면, 죽고 못 살겠는 예쁜 자식이어도 가끔은 오늘처럼 좀 떨어트려놓고 싶은 날이 있다. 지방으로 훌쩍 떠나 혼자 쉬다 오고 싶은 마음이 가슴을 요동치는 날도 고장 난 알람시계마냥 불쑥 찾아온다. 반대로 나도 부모와 분리되고 싶을 때가 있다. 적당한 거리두기가 껴있어야 가까워지는 아이러니한 관계들에 대해서도 부대끼는 경험들로 알아갔다. 그렇지만 영원한 거리두기 앞에서는 전부 소용없을 일이었다. 거리두기의 평안에는 선택적 거리두기라는 전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어야 했고 거리두기 저편에 남편도 아이도 부모도 동생도 친구도 모두 모두 그대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다.


순간 '아내'가 빠졌다고 알려드릴까 했던 잠이 덜 깬 내가 떠오른다



작년 11월 25일로 돌아가 본다. 나는 8개월 된 딸아이와 함께 외할아버지를 찾았다. 명절도 아니고 생신도 아니던 그런 날, 솔직하게는 별다른 일정이 없어 시간이 남는 평일이었다. 무심코 돌아볼 때면 어김없이 시선이 나를 향해 계셨던 분. 이제는 그 시선이 나의 딸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겹겹이 페스추리처럼 주름진 눈웃음과 한껏 올라간 마른 입꼬리엔 반가움만으론 부족한 행복도 묻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의 저편에서부터 줄곧 그랬다. 나를 보면 웃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무척 든든했다. '오늘도 나 잘 왔구나.' 했다.


"꽃 피는 봄에 다시 올게 할아버지. 그때는 꼭 아이들 둘 다 데리고 올게요"


거리두기라는 이름으로 꽁꽁 묶였던 2020년이 지나고 이제는 희망일 줄 알았던 2021년이 카운트된 지 고작 이틀 만이었다. 아무 날도 아니던 그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는 거짓말처럼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꽃피는 봄은커녕 눈물도 얼어버릴 듯 추운 겨울날, 나는 그 따뜻했던 눈웃음을 잊을세라 언 가슴속에 꾹꾹 담았다. 할아버지의 낡은 성경책을 보다 엉엉 울었다. 그저 우리는 자꾸만 뒤늦게 깨달을 뿐이다. 그렇게라도 깨달으면 다행일 뿐이고. 전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 나서야  말이 많아진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었지만 또 반복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늘이라는 일상에 충실해보 것이다. 회복 불가능한 거리두기가 찾아와 버리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인사라도 건네는 것이다. 시덥잖은 몇 마디가 전부이더라도 미루지 말고 전화기를 드는 것이다. 내 맘을 울리는 노래를 주저 말고 사랑하는 아빠에게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 맘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조심하기만 하다가 놓쳐버릴 것들이야말로 진짜 조심하는 것이다. 거짓말하지 않하늘을 보고 힘을 내어 다시 걷는 것이다. 멋진 기러기떼를 발견해 엄마를 부르는 아이를 고마운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이다. 깜깜한 새벽 일터로 향하는 남편의 수고를 권리로 여기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다. 밤낮으로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존재를 다행으로 여겨보는 것이다. 후회되는 어제오늘과 내일을 발목 잡히지 않는 것이다. 사방에서 우리들 사이사이에 치고 있는 입마개와 유리벽에 최소한의 마음까지 막아버리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는 결국 사랑으로 태어났고, 서로의 온기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가을색 좀 더 보려니 창밖으로 첫눈이 내린다.

가을향 좀 맡으려니 겨울 냄새로 코끝이 시리.

가을은 늘 그런 식이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춰 바닥도 바라보고 고개도 들게 해 놓고는 제 할 일을 했다는 듯 금방 사라지는 바람 같다. 무심한 듯 주변을 상기시켜 놓고 떠나간 멋스러운 나그네와 닮았다. 가을 낭만에 허물어진 마음으로 곁을 돌아볼 스를 쥐어주더니 꼭 껴안으라며 겨울을 데려온다. 곡식이 익고 열매도 맺는 수확의 계절이면서도 추풍낙엽은 맥없이 떨어지듯이, 올 해는 가깝고 먼 이들의 이별 소식 또한 끊임없어 아린 계절이다. 떨어진 낙엽에만 취해있지 말고 지금 거둘 수 있는 사랑으로 시선을 돌려야겠다. 이 순간에도 내가 수확할 수 있는 작은 열매가 있음을 믿으므로. 숨어서 핑계 대기 딱 좋은 진짜 겨울이 와버리기 전에 말이다.



내가 전화 걸 상대가 있다는 것도,

그 상대가 내 전화를 받고 있는 것도,

어느 것 하나당연한 건 없었다.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듯 깊고 짙게 깔린 가을 길
당연하지 않은 어느 날, 사랑이라는 배경에 담긴 사랑과 사랑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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