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deconstructivism)는 이름을 잘 붙인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해체주의 작품들을 보면 구성들을 ‘해체’한다는 그 의미가 잘 와 닿는다.
해체주의는 기존 건축의 안정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지향했다. 이제는 건물이 더 이상 정적이지 않다. 가만히 있는 건물에서 역동감을 느낄 수 있고 긴장감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3차원 곡면 같은 기하학적으로 복잡한 형태들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인용’ 이란 키워드로 요약한다면, 해체주의는 ‘긴장감’ 이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쉬운 이해를 위해 해체주의의 성향이 강한 건축물들을 가져와 보았다.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 등, 21세기 가장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들이기도 하다.
프랭크 게리
Frank Gehry
게리 하우스
Gehry House
게리하우스
사진 archdaily, AecCafe
이름 그대로 게리의 집이다. 오래된 주택을 구입한 후, 게리는 집을 저렇게 바꿔놓았다. 자신의 집으로 해체주의를 실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난해하고 정신없는 집을 짓는 그는, 당시 이웃들에게도 역시 이해불가였다. 당시 이웃은 완성된 집을 보고 여전히 공사 중인 줄 알았다고 한다. 내가 봐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다음에 등장하는 게리의 건물을 본다면 이 집도 왠지 달라 보일지도 모른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Bilbao Guggenheim Museum
게리의 스케치
사진 guggenheim-bilbao.eus
게리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일 것이다. 먼저 그의 스케치를 보자. 낙서하듯이 그린 그림 같고 대체 이게 뭔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완성된 미술관 사진을 보면 이 스케치가 뭘 표현하려고 한 건지 약간은 이해가 될 것이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사진 archdaily, guggenheim
역동성과 추상적 표현
나는 처음 이 건물을 보고 파도가 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건물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치는 것 같았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이 건물을 보고 움직이는 듯한 역동감과 생동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 건물이 물고기나 꽃을 모티브로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모티브로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이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해체주의에서는 더 이상 사물을 형상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건축가는 감정이나 분위기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전달하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이 과거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과의 큰 차이이다.
3d 모델링 프로그램의 활용
사진처럼 이 건물은 어디 하나 구부러지지 않은 면이 없고 정돈된 곳이 없다. 그야말로 비정형적인 형태의 건물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곡면이 많은 이 건물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다. 게리는 항공기 설계에 사용되던 CATIA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이처럼 컴퓨터 설계기술은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디자인들을 가능하게 했다. DDP 같은 자하 하디드의 건축에서도 이런 컴퓨터 프로그램을 잘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수만 장의 서로 다른 곡면의 패널들을 디자인하는 것은 이런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DDP 외부의 패널들
사진 dezeen
자하 하디드
Zaha Hadid
안트베르펜 포트 하우스 Antwerp Port House
안트베르펜 포트하우스
사진 archdaily
긴장감과 대조
해체주의의 ‘긴장감’이라는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이 건물을 가져와 보았다. 오래된 건물 위에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건물이 올라가 있다. 오래된 건물 위의 크고 돌출되어있는 매스(덩어리)는 불안정해 보이면서 무너질 것만 같은 긴장감을 만든다. 원래의 건물 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건물을 올렸지만, 이질감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기보다는 이 두 분위기의 대조가 강렬한 임팩트를 준다. 이는 다른 해체주의 작품들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방식이다.
다니엘 리베스킨트 Daniel Libeskind
리베스킨트는 뉴욕 그라운드 제로,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으로 유명한 건축가이다. 특유의 격정적인 디자인으로 그는 게리 이후 해체주의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알려진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Berlin Jewish Museum
유대인박물관의 외벽
사진 jmberlin.de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과거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건물에 담았다. 사진과 건물의 평면에서 알 수 있듯이 리베스킨트는 해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했다. 유대인들의 상처를 보여주듯 건물에는 갈라짐, 깨짐의 모티프들이 많다. 건물의 구불구불한 구조는 해체되어있는 다윗의 별(유대인의 상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의 계단과 창에서도 해체주의적인 요소들로
건물의 컨셉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jmberlin.de
드레스덴 군사 박물관 Dresden Military museum
사진 libeskind.com
리베스킨트의 드레드덴 군사 박물관이다. 개인적으로 이 건물은 굳이 꼭 소개하고 싶었다. 리베스킨트는 자기가 즐겨 쓰는 해체주의라는 방식을 통해 박물관을 만들면서도 역사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그는 과거 나치의 무기공장으로 쓰이던 이 건물에 벽을 뚫고 나오는 거대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이것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경고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사진 libeskind.com
개인적으로 리베스킨트의 건물들이 다소 과격하고 자극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해체주의를 통해 이런 역사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이 건물의 방식은 너무나 적절하다고 느껴진다.
‘사선’의 사용
리베스킨트의 건축에서는 사선과 뾰족하게 각이진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자하 하디드 같은 해체주의 건축가들의 작품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사선과 날카로운 각도들을 사용해 시각을 자극하고 긴장을 유발한다.
리베스킨트 덴버 미술관
Denver Art Museum
덴버미술관
사진 archdaily, homesthetics
자하 하디드 비트라 소방서
Vitra Fire station
비트라 소방서
사진 archdaily
렘 콜하스 시애틀 공공도서관 Seattle Public Library
시애틀 공공도서관
사진 archdaily
피터 아이젠만 Peter Eisenman
아이젠만 하우스 III Eisenman house III
컨셉을 표현한 다이어그램과 모형, 건물
사진 eisenman architects
피터 아이젠만의 1971년작 아이젠만 하우스 III는 건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해체주의를 시험하고 있다. 이 건물의 컨셉은 이렇다. 먼저 정육면체의 그리드를 이용해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의 매스(덩어리)를 만들었다. 이 두 매스를 겹친 것이 이 건물의 실내가 되었고, 남은 부분들은 테라스가 되었다. 그리드를 이용한 흔하고 단순한 구조에 반항이라도 하듯, 이 주택은 그야말로 해체되어있는 듯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건물의 내부
사진 eisenman architects
형식의 해체
벽, 기둥, 창문 등 우리는 이런 식으로 무언가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 특성을 정의한다. 예를 들면 벽의 특성은 땅에서 수직으로 세워져 두 공간을 분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초등학생들한테 집을 그리라고 하면 대부분 박공지붕에 네모난 창문이 있는 집을 그릴 것이다. 지붕은 지붕처럼 그리고 창문은 창문처럼 그린다. 현실적인 아이라면 아파트를 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항아가 아니라면 아무도 게리 하우스 같은 집을 그리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가 언어에 의해 형식이라는 틀 안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의 건축이었다. 벽은 벽처럼 만들고 기둥은 기둥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계속 건물같이 생긴 건물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체주의는 이것을 거부했다. 현대미술이 그렇듯, 건축도 기존의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건물을 건물처럼 짓지 않게 된 것이다.
다음은 해체주의 건축의 예시들이다.
피터 쿡 그라츠 쿤스트하우스 Kunathaus Graz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쿤스트하우스
사진 Area
자하 하디드 헤이다르 알리예브 센터 Heydar Aliyev center
아제르바이잔의 헤이다르 알리예브 센터
사진 archdaily
리베스킨트 덴버 미술관
Denver Art Museum
덴버미술관 내부
사진 archdaily
쿱 힘멜블라우리옹 Confluence Museum
Confluence Museum Lyon
프랑스 리옹의 Confluence Museum
사진 designboom
프랭크 게리 파리 루이뷔통 박물관 Louis Vuitton Museum Paris
파리 루이비통 박물관
사진 루이비통재단
해체주의 건축의 성공사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앞에서 이야기했던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해체주의 건축 중에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 미술관은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사진 guggenheim-bilbao.eus
1980년대 빌바오는 산업의 쇠퇴로 실업률이 높고 경기는 침체되어있었다.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이 미술관은 1997년 개관한 이후 매년 1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 미술관으로 인해 도시의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도시를 부활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00억 원대의 비용을 들여 만든 이 미술관은 지금까지 2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초기에 주민의 95%가 반대하던 미술관 건설은 한 도시를 재생시키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이 도시의 변화를 목격한 게리는 건축가로서 얼마나 기뻤을까.
해체주의 건축은 앞서 본 것처럼 미래지향적이고 시선을 끄는 확실한 개성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분명하다.
조화의 문제
이전에 해체주의를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특성이 해체주의랑 만나면서 상당히 눈에 띄는 자극적인 형태의 건물들이 많아졌다. 앞에서 본 예시들에서 알 수 있듯이 해체주의 건물들은 디자인이 대부분 상당히 과격하고 도전적이다.
따라서 해체주의 건물들은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다. 주변의 맥락은 무시하고 자신만 돋보이면 된다는 이기적인 건축이라는 것이다.
효율성의 문제
해체주의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효율성이다. 이건 앞에서 말한 문제보다 훨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공사비용이나 공간 효율 측면에서 다른 네모난 건물들보다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축비가 초기 계획의 14배로 늘었고 자하 하디드의 DDP는 6배로 늘었다.
특히 공공시설에서, 건설비는 높고 수용공간은 적은 해체주의 건물을 유지하려면 건물이 지역에 그만한 경제적 이득을 주어야만 한다. 때문에 해체주의 건물은 관광객과 지역의 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지만, 실패한다면 없느니 못한 애물단지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럼 이번에 해체주의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을 살펴보자.
DDP의 사례
역시 언제나 등장하는 만만한(?) DDP 이야기를 또 안 할 수가 없다. DDP가 실패한 사례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체주의 건축의 문제점들을 잘 보여주기에 마침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건축물과 주변 환경의 조화에 대한 논쟁은 주관적인 부분이 크기 때문에 다루지 않으려 한다.
사진 한겨레
비용 문제
심사과정에서 자하 하디드의 안이 당선되고 나서 필요한 예산은 두 배로 커졌다. 특히 공사비는 초기 계획한 763억 원에서 3481억 원으로 4.5배가 늘어났다. 결국 DDP를 완성하기까지 총 5000억 원 정도가 들었다. 이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5배 가까이 되는 비용이다. (참고로 두 건물의 건축면적은 비슷하고 연면적은 DDP가 구겐하임의 3.5배이다)
비용 문제와 함께 DDP는 공간 효율이나 배치면에서도 상당히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밖에서 보기엔 웅장해 보이지만, 막상 내부 공간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나는 전시를 보러 지금까지 한 5번 정도 DDP를 방문했었다. 보통 전시공간은 ‘디자인 둘레길’을 따라 경사를 내려가는 구조인데, DDP 건물의 크기를 생각하면 길이가 상당히 짧다.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의 전시실 하나보다도 적게 느껴진다.
또 밖이 보이지 않는 복잡한 건물구조 때문에 전시장을 찾아가기가 항상 혼란스럽다. 게다가 ‘미술관’이 아닌 ‘복합 문화공간’으로 애매하게 만들어진 탓에 안 그래도 복잡한 구조에 여러 다른 시설들이 섞여있게 되었다.
DDP의 2층 도면
사진 archdaily
뜬금없는 외부 티켓박스가 공간계획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juneunicorn.com
서울시청과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서울시청
DDP 이전에 비슷한 논란이 된 건물이 있었다. 아마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바로 서울 시청 신청사이다. 당시도 이 건물에 대한 부조화와 효율성 논란이 많았다.
서울시청의 외관과 내부사진
사진 서울건축가이드, 동아일보
“외벽 안쪽에 벽을 세워 사무실을 만들어서 바닥면적 중 5분의 1 가량이 빈 공간으로 남게 됐다”
“여러 곳의 청사를 통합한다는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5000명의 본청 공무원 중 2205명만이 신청사로 입주했다. “
시청 건물을 비판하는 당시 기사들의 내용이다. 시청부지 자체의 제약이 많아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해체주의 스타일의 건물 형태에 있다.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안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에 자하 하디드의 안이 당선이 되었었다. 하지만 2조 원이 넘는 비용이 드는 것으로 판단되는 바람에 결국 이 설계안을 포기하고 설계를 재 공모했다. 자하 특유의 디자인이 느껴지는 이 건물은 외형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결정적으로 비용 문제가 심각했다. 가운데의 아치 두 개를 세우는데 필요한 철골 값만 해도 무려 1800억이 든다고 한다.
자하하디드의 주경기장 설계안
사진 wordpress.com
마치며
이렇게 해체주의 건축은 효율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쓰이긴 어려운 양식인 것이 사실이다. 해체주의 건축물들은 요즘 건축잡지 등에서 렌더링으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실제로 해체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건물은 많이 지어지지 않는다.
모더니즘이 현실에 가까운 양식이라면 해체주의는 이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해체주의에 대해서만 다뤘지만, 현대(contemporary)에는 여러 양식의 건물들이 공존하고 있다. 미니멀리즘과 하이테크 등이다. 이들도 해체주의만큼 개성이 있는 양식들이라서 이후에 한번 정리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