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갈 수 없는 노후의 두려움
종합병원은 개인병원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소란스러우면서도 긴장감이 흐르고 탁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특히 소화기 암 센터 앞에 앉아 있는 환자들의 표정은 침울하기까지 하다. 나 또한 그렇게 보일 것이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연령대도 다양해 병 앞에서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추운 겨울,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목부터 입술까지 바짝 말라 빨리 끝내고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밖은 아직 어두운데 병원이 밝디 밝아서 인지 안에서 보는 세상은 암흑이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 이른 시간인데도 채혈실 앞에는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병원에만 오면 세상에 아픈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관과 별관을 오가며 채혈과 온갖 검사를 하고 대기실에 앉을 때쯤이면 허기가 질 때로 진다. 굶주린 배는 어쩔 수 없지만, 검사가 모두 끝나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어 행복하다.
대기실에서의 기다림은 이런저런 생각의 가지를 뻗어내기 참 좋다. 그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지만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증환자가 많은 과여서 그런지 대부분 보호자가 함께한다. 특히 노부모를 모시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보호자는 대기실에 부모님을 앉혀두고 접수와 수납, 약을 타오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한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 처음 들었던 이야기는 지금은 괜찮지만 나이 들면 후회할 거라는 말이었다. 얼마 전 엄마가 허리 수술로 입원하셨다. 진단을 받고 입원, 수술, 퇴원과 재활까지 모든 것을 챙겼다.
“네가 있어 다행이다.”
“나 혼자 어쩔뻔했니.”
엄마는 아픈 내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허리 수술로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 아찔하셨을 것이다. 또한 모르는 손에 자신을 의탁하기에는 아직 엄마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자식의 입장으로 부모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마다 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파고든다.
‘노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이 듣는 질문은 노후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서로 좋지만,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늙고 병들면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들이다. 나의 노후를 무엇보다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기쁜 일이 아니다. 남편과 수도 없이 이야기해본 주제지만 항상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결론만 남는다. 자식이 있다 한들 도와달라고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될지 모르고, 자식의 헌신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남편의 생각. 아이를 갖지 않는 것에 대해 나보다 깊이 생각했으리라. 머리로는 알면서도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약해진다. 손발이 불편하고 거동이 힘들 때 어떻게 병원에 와야 하나? 함께 늙어갈 것이고, 그중 한 명은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인데 남은 사람은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병원에 데려다주고, 번거로운 일들을 해줄 그런 사람은 어떻게 구해야 하느냐는 따위의 생각들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는 노인이 되어 병원 대기실에 홀로 앉아있는 나를 발견한다.
호명하는 소리에 상념이 흩어진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관찰대상이다. 몇 달 후 오늘의 과정을 반복하면 될 것이다. 진료실을 빠져나와 제법 익숙해진 간호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눈다.
병원 문을 나서니 청명한 겨울 아침이 반긴다. 가슴을 한껏 부풀려 들이쉬니, 차디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생기가 퍼진다. 출근 시간이라 거리에는 볼을 때리는 겨울바람을 받아내며 서둘러 걷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고 여러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이 스스로의 선택을 끝없이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침의 분주함이다. 모든 걱정, 근심을 병원에 두고 물 한 모금의 충분한 행복함으로 사람들과 나란히 맞춰 선다. 횡단보도 위 신발들처럼 같은 듯 다른 삶을 함께 할 수 있으매 안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