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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수라 Sep 20. 2022

비와 당신

폭우가 쏟아지는 아침, 이른 시간부터 우산을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속을 뚫고 하나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이미 신발을 다 적신 비는 바짓단을 타고 올라 종아리까지 번져있었다. 우산을 아무리 잘 쓰려고 해도 바람을 타고 들이치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온몸 여기저기 얼룩을 만들었다. 정류장 지붕 안에 안착하지 못 한 사람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튀는 물방울을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오전에 출근하는 엄마와 오후에 출근하는 아빠의 시차 때문에 하루의 몇 시간은 혼자서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은 TV를 보고 인형 놀이를 하면 되었는데 비가 오면 쉽지 않았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었고, 천둥·번개라도 치면 이불속에 숨어들어 엄마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날에는 TV 소리도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비가 오는 아침이면 엄마를 붙들고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오늘만 안 나가면 안 되느냐고 떼쓰고 우는 나를 엄마는 매몰차게 밀어내고 출근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미웠고 비가 싫었다.


비 오는 날이 계속되면서 어린 나에게도 노하우가 생겼다. 혼자 시간을 보내다 무서워지면 창문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럼 조금 위안이 되는듯했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비만 오면 엄마가 올 때까지 창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우산을 쓴 사람들 사이로 금방이라도 엄마가 보일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앉아있으면 신기하게 시간이 빨리 갔고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차근차근 비와 친해지고 있었고 사이로 느껴지는 온기에 안도했다.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엄마는 비 오는 날이면 창을 열어두고 찻잔의 온기가 식을 때까지 진득하게 풍경을 내다봤다. 그 순간이 금세 지날까 봐 다른 일은 하지도 못하고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표정은 한없이 행복하고 눈빛은 아득해 보였다.

“엄마는 비가 그렇게 좋아? 왜 좋아?”

여전히 내리는 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엄마는 대답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 날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건 축복이야.”

“무슨 축복씩이나 해.”

“살만해졌다는 얘기고 젖은 발로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순간이지.”

단순히 왜 좋은지 묻는 말에 비해 대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4시간 왕복의 회사에 다니던 엄마는 늘 시간에 쫓기고 뛰어다니는 사람이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깨어나 하루 분량의 식사를 준비해두고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특히 날씨가 궂으면 더 종종걸음을 해야 했는데, 여름비는 눅진하게 스며들어 온몸을 적셨고, 겨울비는 버스를 기다리는 발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퇴근 후에는 어린 딸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잠시도 걸음을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전력 질주로 집에 돌아오면 늘어놓은 옷가지와 장난감, 설거지를 처리해야 했다. 저녁 먹는 것도 잊고 기다렸을 아이를 보듬다 보면 자정을 훌쩍 넘겼고 매달리는 아이를 재운 후에야 쪽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고단하고 녹록하지 않은 삶은 편히 자는 것 하나도 쉽사리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엄마에게 비는 그냥 시원하게 내리는 자연의 고마움이 아니었다. 이제는 고단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지대가 낮아 비에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골목을 뛰듯이 날아들지 않아도, 비 때문에 차가 막혀 지각 걱정할 필요도, 엄마 없이 무서워할 아이를 생각하며 가슴 무너질 일이 없어도 된다는 안식의 의미이다.


베란다 창을 크게 열고 창 앞에 자리를 잡았다. 푸른 달이 부서져 떨어지는 것처럼 강한 비가 바닥과 나뭇잎을 세차게 때렸다. 어린아이를 안고 빗속을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져 간다. 내 마음 창가에 두 사람이 보인다. 내리는 비의 시간이 아까워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와, 엄마가 그리워 창가를 떠나지 못하는 여자애가 나란히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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