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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수라 Mar 23. 2023

아까운 물건을 대하듯

고통은 나를 멈춰 세웠다

종합검진 기간이 돌아왔다. 5년에 한 번씩은 권장되고 있는 대장내시경과 정밀검사를 위해 복부 CT도 찍기로 했다. 3일 전부터 흰 죽과 간장, 카스텔라 등 식이요법을 하는데 매운 음식을 못 먹으니 속이 매슥거리고 개운하지 않았다. 못 먹게 되는 순간부터 당기는 음식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남편 말대로 청개구리 띠가 맞나 보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건강검진 날. 7시 30분부터 검사가 시작되었다. 남편과 나는 따로  안내하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예정된 검사를 진행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봐 위와 대장 내시경, 복부 CT만 남았다.


복부 CT는 조영제를 혈관에 투여해 검사하는데 미리 신장에 이상은 없는지 결과를 확인한 후 부작용에 관해 설명을 듣고 시작한다. 부작용에는 가려움, 붓기, 호흡곤란 등이 있었지만, 의사는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농담처럼 죽을 수도 있냐는 질문에 이런 동의서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며 종합병원 내에 있는 검진센터이니 문제가 생기면 즉시 조처를 할 수 있어 괜찮다고 했다. 그냥 한 질문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니 평생 병원과 약을 멀리해서인지 용량이 적은 양에도 녹다운이 되는 남편이 걱정되었다.


검사는 팔을 위로 올린 상태에서 미리 연결해 둔 혈관 바늘을 통해 약물을 주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약물이 주입될 때 열감이 있을 수 있지만 금세 없어진다고 했기에 서서히 올라오는 뜨끈한 느낌을 무시하고 진행했다. 불과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열감은 전신으로 퍼져 입안의 수분이 증발하고 몸 안에서 불기둥이 활활 타올랐다. 끝났다는 소리에 천천히 검사대에서 내려오는데 입술이 붓고 눈에 눈물이 맺히고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검사관은 나를 부축해 의사에게 데려갔고 알레르기 주사를 처방받았다. 일어나서 주사를 맞으러 가는데 다리가 쑥 하고 빠지면서 무릎이 꺾였다. 그때부터 증세는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심장을 쥐어뜯듯 아팠고, 명치끝이 답답했으며 온몸의 간지러움은 섬뜩하리만큼 날카롭고 뜨거웠다. 끔찍한 고통이 지속되면서 눈에 힘을 줘도 뿌옇게 성에가 끼듯 시야가 흐려졌다. 의사는 병원 종사자들에게 소리쳤고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했다. ‘목 안이 붓고 있어요? 좁아지는 느낌입니까? 반복적인 질문을 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깜빡 정신을 잃었는지 여러 명이 나를 침대에 태우고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코너에서 코너로 그 순간 ‘아 너무 빨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달리면서도 의사는 계속해서 질문을 했고 무어라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블랙아웃, 다음 장면은 혈압이 계속 떨어진다는 의사 말에 나의 발치가 올라갔고 팔 여기저기 연결된 줄들에서 맑은 액체가 쏟아졌다. 내려간 혈압은 쉽사리 올라오지 못했고 계속 까무러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속했는지 정신이 완전히 돌아왔을 때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큰 눈이 더 커져 있고 사색이 되어 잔뜩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살면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결국 힘들게 준비한 대장내시경을 하지 못했다.


내가 겪은 일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건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느낀 감정은 감히 죽음 앞에선 자의 고통이었다고 기억하고 싶다. 아이러니하게 가장 큰 두려움의 중심에는 그가 겪을 공포가 있었다. 같은 검사를 했는데 나와 같은 부작용이 있으면 어떡하지? 무서울 텐데 하는 생각,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상태에 처해 슬펐다.


‘우리 서로를 아까워서 사용 못 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자. 그럼, 상대를 더욱 아끼지 않을까?’


몇 년 전 남편은 내가 한 이야기를 곱씹어 말했었다. 나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고, 정말 그렇게 살면 서로 보금자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노라고, 단 한순간도 이라도 잊지 않으려고 자주 되뇐다고 했다. 결혼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두었다는 말이 고마웠고 잊지 않고 노력해 준 남편의 마음이 찬연했다.


삶이 언제 어디서 멈출지 모른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나니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을 쫓고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에 집중하고 싶지 않아 졌다.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결국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숨 쉬고 있는 나, 눈앞에 선명하게 반짝이는 나날들뿐임을 깨달았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끊임없이 나아가라는 이정표 앞에 가던 길 멈추고 숨을 고른다. 달리지 않을 것이다. 현재 눈앞에 실재하는 삶에 눈을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를 나눠 받는다. 기분 좋은 서늘함을 간직한 흙 위에 가만히 발을 내딛고 그와 함께 발자국을 남겨야겠다. 정성 들여 고운 기억을 온전히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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