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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곰 Jul 12. 2023

05. 낮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던 아이

고개를 아무리 당당히 들어봐도
눈 끝에 닿는 건 누군가의 신발

따뜻한 손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목소리,
하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세상 가장 낮은 시선에서
올려다 세상을 보던 그날과

땅 위에 두 발로 서서
예전의 그곳을 내려다보던 오늘의

사람 살아가는 내음세가
그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어제와 오늘이 맞닿아 있다.




힘들었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 배우가 맡았던 재벌 역할인 조태오는 말한다.

“난 어릴 때부터 매년 올해 감기가 제일 지독하고. 올해 경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을 한 해도 안 빼먹고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죽었나요? 안 죽었잖아.. “


이 대사를 들으면 두 가지 생각 이든다.

우선 드는 생각은 ‘아, 재벌들도 힘은 들겠지, 그럼 사람인데!‘라는 생각과 또 하나는 ’ 참 우리 사회는 위기의식을 잘 조장해.. 부려 먹으려고 ‘이다.


그리고 실제로 재벌이 아닌 나 역시 이러한 비슷한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어렸을 적에는 주로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특히 IMF를 겪은 다음에는 꾸준히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달곰아.. 지금 경기가 진짜 안 좋으니까 좀 아껴 쓰고, 이제 더 이상 애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철이 들어야 해. 알겠지?’ 하도 많이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알겠어요, 그나저나 진짜 안 힘든 시절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회사에서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 두 번의 이직을 통해 세 개의 나름 커다란 기업에 다니고 있다. 회사는 달라도 각자의 ‘위기의식 도출’ 레퍼토리가 똑같다. 매출이 좋으면 앞으로 어려울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하고.. 매출이 좀 꺾이면 이제 앞으로가 진짜 위기가 올 것이라고 말을 한다.


어린 시절과 신입 사원 때는 그 말들에 아주 거하게 속았었다. 1994년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발언을 전하던 MBC 9시 뉴스를 보다가, 급하게 라면을 사재기하러 뛰쳐나가셨던 할머니처럼… 아이고 이제 정말 곧 위기가 오려나보다! 하고.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도달하며 몇 번의 인생의 굴곡점을 경험하였고, 스스로 판단하기에 너무나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들도 더러 있었다.

남들이 나에게 알려주는 위기가 아니라 정말 스스로 느끼는 위기감.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삶의 격한 파도가 몰아 치는 순간들.

그 파도가 종종 나를 잡아 삼킬 것만 같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피하려고 몸부림을 쳐도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묻곤 했다.

지금이 정말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인가.


더듬더듬 생각의 흐름을 올리다 보면 다른 기억들이 살며시 윤곽들을 드러냈다.

아 지금이 제일 힘든 건 아닌가 보구나.

그래, 그렇다면 지금은 버틸만한 거다.


반지하, 8평, 세 사람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즌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항상 마음속에서 선두권으로 달리고 있는 시절이 있다. 바로 유년기인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중 2 때까지의 3년간의 시간이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지방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생을 서울에서 지내 왔다. 거의 평생의 시간을 보낸 서울이란 도시는 내 삶에 친숙한 고향이었지만, 2년의 시간을 시골에서 보내다 올라왔단 1995년의 서울은 나에게 너무나도 낯선 곳이었다.


이전에는 강북 지역에서 쭈욱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 왔기 때문일까? 지방 생활 이후 다시 온 서울이 낯설어서일까?  서울이라는 도시와 사람들이 주는 압박감에 어린 나는 자신감이 한풀 꺾여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 가족은 90년대 말 강남에 입성하였다. 강남은 강남인데.. 우리 집의 당시 모습은 우리가 미디어나 언론으로 보아오던 강남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단독 주택에 딸려 있는 반지하.

반지하 공간에는 3개의 방이 있었고 3개의 세대가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지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이러한 반지하에 대해 굉장히 디테일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화장실 관련 신을 보면 그 시절 옛 기억들이 생생하게 소환된다. 반지하에 있는 화장실들은 대부분 변기가 높은 곳에 있다. 수로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비가 오면 실제로 역행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그럼 정말로 그 화장실이란 공간은 도망가고 싶은 곳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도망갈 곳이 없다. 그곳이 집이었으니.


그런 8평 남짓한 공간에서 엄마, 나, 내 동생. 우리 세 가족이 다 같이 지냈다. 부엌을 빼고 세 개의 책상과 옷장을 배치하고 나면 겨우겨우 각자가 몸을 누우실 수 있었던 그 반지하에서.


땅속에서 가장 많은 꿈을 꾸다

그 당시 유년기의 나는 다소 어두운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안 그래도 친구가 많이 없는 어딘가 우중충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는데 겨울 방학중에 이사를 오다 보니 동네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씨가 마르고 말았다. 정말 어디 놀러 나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 당시 유일하게 맘을 두고 지낼 친구라고는 동생뿐이었다. 그 당시의 동생에게도 나뿐이었으리. 그렇게 우리는 친구 대신에 서로 좋고 싫든 돈독한 우애를 쌓을 수 있었다.


갈 곳도 마땅히 없던 나는 그 반지하 집에서 계속해서 만화를 보고, 그림을 그렸다. 항상 바로 옆에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켜둔 채로. 나는 그 지하 방에 있었고 손은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작은 전축기가 다양한 노래를 들려주며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어떤 노래도 편식하지 않고 배불리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답답해지면 밖으로 나가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발이 가는 대로 가면서 동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밖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다 지치면 다시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 다시 펜을 들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물리적인 답답함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일까? 가장 꿈이 커지던 시절 세상 작은 공간에 갇힌 채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졌다. 집중을 하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지하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이어 나가는 상상의 나래대로 그곳에 내가 존재했다. 그리고 음악은 그러한 상상력을 올려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막연한 자유로움이 좋아서일까? 나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3년의 시간 동안 나는 세상에 존재했지만 마치 없는 듯 지냈다.


땅 위에 존재했지만 반은 지하에 묻혀있던 그 집처럼.


다들 행복하게 살고 계신가요?

반지하에는 세 집이 존재했다.

가장 안쪽 집에는 젊은 여성들이 살았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주로 밤에 일하는 분들이 아니셨을까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집인가 싶을 만큼 고요했다.


 그 앞집에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가 살았는데 아저씨가 일식집에서 일을 하는 젊은 요리사였다. 단단한 체구에 각진 얼굴형에 목소리부터 표정까지 기운과 패기가 넘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집 와이프의 얼굴은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그 집에서는 종종 새댁의 불평 섞인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은 있다. 들어보면 대부분 빨리 이사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주로 우리 형제와 화장실에서 마주치고 난 다음에 그 목소리가 크게 들리곤 했는데 지금 되새겨 보면 얼마나 싫었을지 이해가 간다. 그때도 이유 없이 내가 혹시 잘못을 했나 눈치를 봤던 것 같다.


우리 윗집은 2층 짜리 단독주택이었는데 주인집이 살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60세쯤 된 할아버지 셨는데 앞마당을 정리하다 종종 장난을 치신다고 우리 집 창문 앞에 오셔서 말을 건네곤 하셨다. 집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면 아저씨의 신발이 보였다. 당연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성인 남성이 없어서였을까, 그 목소리가 매우 따뜻하게 들리던 기억이 있다.


 당시 기준으로 그 목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들리는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반지하에서 고개 들어 바라다본 작은 창으로 보이던 그곳이 당시 우리 집에서는 하늘과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2년을 채 채우지 않고 분당의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는 날 집주인 할머니는 우리를 따라오셨다.  젊은 여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사는 것이 내내 안쓰러웠는지 우리를 살뜰히 챙겨주시던 맘 따뜻한 노부부였다.


이사 간 집에서 주인 할머니는 마치 외할머니라도 되는 마냥 엉엉 우셨다. 너무 잘 되었다고. 우리 집 반지하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잘되어서 나간다고 자기가 그러지 않았냐며.


타인의 나를 위한 따뜻한 눈물.

살면서 그런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가며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따뜻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종종 그 반지하 집을 방문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 속의 나는 집의 대문을 지나가고 작은 앞마당을 거쳐 그 반지하로 내려간다.


그리고 문을 열고 두 발짝 부엌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건넨다.


여기 이 땅속에 잘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나는 이제 잘 있다고.

너를 잊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오늘의 하루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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