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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호 Jun 25. 2022

<파랑, 새> 양승욱 작가, 임폴 작가

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상

지난 2019년 겨울, 양승욱 작가의 새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이미 차가워져 있던 새를 마주하게 되었지만 당시 일을 가야 했던 그는 새를 들여다볼 시간도 없이 묻었다. 무덤 위에 새를 위한 작은 돌들 올려두고 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새의 빈자리는 그에게 죄책감으로 남았다. 너무 급하게 묻어주어서 깊게 땅을 파지 못해 다른 무언가가 물어갔을거 같다고 그걸 마주할 자신이 없다며 그 자리에 다시 가지도 못했다. 그러고는 깊은 우물 같은 우울 속에 잠겨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위로를 하기 위해 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가 산산이 부서진거 같았다. 되려 이야기를 꺼내면 붙어가던 것이 다시 흐트러질 거 같아 조심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그가 문득 새에 관한 이야기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만지고 싶은데 만질 수 없는 촉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던 거 같다. 나는 그 당시에는 그의 말이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했다.

양승욱, Home, Bittersweet Home, 2018

양승욱 작가 홈페이지 [Home, Bittersweet home] 포트폴리오 https://url.kr/hw6mz5

[Home, Bittersweet home]은 양승욱 작가의 조부모님의 치매 투병부터 삶의 끝 까지 기록한 작업이다. 조부모님을 돌보게 되면서 밖에 나가서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니 자연스럽게 주변을 이루는 일상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들은 처음에 카메라 렌즈에 거부감을 보였지만, 장례식장에서 이걸 찍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작가에게 찍지 않고 뭐하냐며 오히려 등을 떠밀게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뒤 한동안 그는 사진을 열어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약 5년 뒤, 2018년 10월 류가헌 갤러리에서 작업을 발표했다. 당시 전시장에서 배경음악으로 최승희의 이태리의 정원을 틀어놓았다.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저녁 종소리 들려오면 세레나데 부르면서 사랑을 속삭이며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그의 새가 떠난지 약 일년하고도 반이 지난 2020년 7월 26일, 공간 서울에서 임폴 작가와 함께 하는 이인전 <파랑, 새>가 열렸다. 작가가 각각 자신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파랑과 새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전시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새의 알을 손 위에 올려둔 사진과 손 모형, 파란 원을 그린 그림의 배치였다.

<파랑, 새> 전시 전경, 양승욱, 임폴 2인전 @공간서울 2020.07.25-08.15

좌: 양승욱 <새> 디지털 프린트, 60×40, 2020

중: 임폴 <파랑=0과 o> 합판에 아크릴, 1호, 2호, 2020
우: 임폴 <파랑+손> 가변설치, 83×243cm, 2020


새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낳았던 알을 찍은 사진. 알을 낳았었는지 묻자 새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 이유도 알막힘으로 인한 쇼크사 였다고 했다.

나 또한 지난 봄과 여름 사이 19년 동안 함께한 개를 떠나보냈다. 숨을 쉬지 않는게 믿겨지지 않아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하기 전까지 개를 쓰다듬던 감촉을 기억하기 위해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그제야 그가 만지고 싶은데 만질 수 없는 촉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시고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어 잘 웃지도 않으시던 얼굴에 선물로 사온 크림을 발라주었을 때 웃어주시던 그 모습으로 기억한다. 할머니의 볼과 크림의 감촉이 아직 생생하다. 나에게 촉감은 잃어버린,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것을 기억하는 감각이다. 조금이라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상실을 촉각으로 기억한다. 더 이상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곧 죽음을 뜻한다. 나는 이 세 작품의 배치를 보며 부서진 채 가라앉아 떠돌아다니던 것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꼈다. 무언가를 만진다는 것은 사랑이며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것이 추모이지 않을까. 내가 살아 숨쉬기 때문에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가끔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져야만 한다.

작품의 어우러짐이 만질 수 없는 무언가를 만졌다고 느꼈다. 그가 이야기하고 싶다던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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