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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un 08. 2021

모노크롬 느낌 <애플>, 사람은 무엇으로 삶을 사는가?

마음을 쏟아 '길들인' 것들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자기 별로 돌아가다

1.


만약 현재의 삶에서 너무나 큰 어려움에 처해 있고 그래서 스스로 감당할 수 없거나, 혹은 현재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스스로 감당하고 싶지 않을 때, 현재의 삶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고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어떨까?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채를 띤 영화 <애플>은, 영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런 우문에 대한 현답을 구하고 있다.


알리스가 성인 남성이라는 것 이외에, 영화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갑자기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알리스는, 신원미상의 무연고 환자로 분류되어 병원에 수용된 후, 병원의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그는 현재의 삶에 대한 기억을 완벽하게 상실하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2.


새로운 삶으로 들어온 알리스의 일상은 단순하다. 병원에서 제공한 새로운 숙소, 몸에 잘 맞지 않는 몇 벌의 옷가지, 식료품을 사기 위해 들르는 숙소 부근의 처음 가보는 가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인생 배우기 과제물. 알리스는 과제물을 매일 성실하게 수행한다.


그런데 나는 알리스의 인생 배우기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생각했다. 결코 알리스가 어린 왕자를 닮았다거나 영화가 동화적 분위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투정만 부리는 장미꽃을 별에 남겨 두고 여행길에 오른 어린 왕자는 여섯 개의 별을 순례한다. 명령할 줄밖에 모르는 왕, 남들이 박수를 쳐 주기만을 바라는 허영꾼,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그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술꾼, 우주의 5억 개의 별이 모두 자기 것이라고 되풀이해 세고 있는 상인, 1분마다 한 번씩 불을 켜고 끄는 점등인, 아직 자기 별도 탐사해 보지 못한 지리학자 – 어린 왕자는 여섯 개의 소혹성 순례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치 알리스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서, 새로 시작한 삶의 힘과 의미를 찾을  없었던 것처럼.


3.


어느 날 문득 알리스는, 자신이 기억상실증 환자로 발견되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본래 자신의 현재였던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는 기억을 회복한 것일까?


어린 왕자는 지구에서 만난 여우로부터 ‘길들여짐’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 - 즉 ‘다른 발자국 소리와 구별되는 네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되는 이유, 빵을 먹지 않는 여우가 금빛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되는 이유, 그리고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행복해지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작별 인사를 할 때 여우는, 선물로 어린 왕자에게 비밀을 하나 가르쳐 준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마음을 쏟아 ‘길들인’ 장미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자기 별로 다시 돌아간다.


그런데 알리스는 어떤 소중함을 기억해 냈기에 자기의 본래 삶으로 다시 돌아갔을까?


알리스가 인생 배우기에서 마지막으로 수행한 과제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을 돌보다가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알리스는 병원에 입원한 어떤 노인을 잠시 돌보았고 - 알리스는 노인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비록 알리스가 음식을 들고 병원에 갔을 때, 병상은 이미 비어 있었지만  - 노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자신의 본래 삶으로 다시 돌아간 후, 자신이 사랑했던 이의 묘지에 꽃을 바친다. 자신이 마음을 쏟아 ‘길들인’ 현재의 슬프고도 힘든 삶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4.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 ‘길들여짐’은 무슨 의미일까? 왜 친구가 되자는 어린 왕자의 제안에 대해 여우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했을까? 과연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여우가 말한 삶에서 길들여짐이란 상호의존성, 즉 수백 개의 과정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왕성하게 일어나면서 그 관계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비록 그 재생산 과정이 종료되면 그 현상들의 존재도 멈추어 버리고, 그 어떤 부분도 남겨두거나 저장할 수 없고, 잠시 동안 존재했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것.


그래서 덧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것, 하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단순 합보다, 부분들이 강화한 전체는 언제나 더욱 크고 강해서, 기적에 가까운 현재의 우리 삶을 존재하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린 왕자도 자기 별로 돌아갔고, 알리스도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5.


영화 <애플>은 화면의 색감도 모노크롬이지만 구조와 스토리도 단선적이다. 그런데 그 단순함의 힘이 대단하다. 매우 미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풍부하다.


“명확한 콘트라스트(명암 대비)는 그냥 검고 흰 것만 남기고 디테일을 다 죽이는데, 콘트라스트를 최대한 억제해 보니 디테일이 더 살아나며, 다양한 높낮이의 회색톤들이 나오더라”는 어느 사진 대가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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