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온트 Jan 18. 2021

우리를 기억하나요(1)

지루한 오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창밖에는 가을을 맞은 나뭇잎들이 흩날리고, 과학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는 둥둥둥 귀를 때리다가 지나갔다. 승연은 오늘도 손에는 샤프를 쥐고 필기를 하는 척, 눈은 선생님의 필기를 좇으며 수업을 듣는 척했지만 실은 머릿속으로 '그 복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복도'를 발견한 것은 몇 해 전의 일이었다. 승연은 아주 낡은 5층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그래도 승연은 이곳이 좋았던 게, 윗집 아랫집 할 것 없이 왕래가 잦아서였다. 옆집 성호네에서 김밥을 얻어먹고, 윗집 은주네에서 홍시 한 바구니를 얻어오는 것이 흔했으니까. 그날도 어김없이 윗집 은주네에 올라가던 길이었다. 못 보던 문이 보였다.


'이런 문이 원래 여기 있었나...?'


언뜻 505호처럼 보였지만 이곳에 505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파트의 3-4호 라인이었기 때문에 503호, 504호가 다였기 때문이다.


끼익 - 승연은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훅 하고 얼굴을 덮쳤다. 승연은 문 너머 기다란 복도를 바라보았다. 꽤나 깊은지 저 멀리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복도 양옆으로 문들이 보였다. 510호, 511호, 512호, 513호 ... 승연은 그곳에 들어가 보려다 문득 무서워져 다시 문을 닫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통로는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멀미기가 승연을 덮쳤다. 승연은 가려던 은주네의 초인종을 누르려던 것도 잊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그날 저녁 승연은 엄마에게 위층에 이상한 문을 아느냐고, 한여름에도 냉기가 가득 돌던 문 너머 복도를 설명했다.


"꿈꿨니? 저녁이나 먹어. 오늘 배추가 아삭한 게 맛있다."


그날 밤 승연은 다시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꿈을 꿨다.


다음날 하굣길 은지가 교문에서 신발끈을 묶고 있던 승연의 어깨를 치며 말을 걸어왔다.


"야, 집에 가냐? 나랑 노래방 안 갈래?"


승연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 복도' 생각이 아직 가득했기 때문이다. 문득 승연은 은지에게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가지 않겠냐고 했다. 토마토 주스를 갈아준다고도. 옆에 누구라도 있으면 다시 문을 보더라도 덜 무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지는 얘가 웬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승연을 따라나섰다.

 

승연은 꿀을 잔뜩 넣어 달달한 토마토 주스의 마지막 모금을 입에 털어 넣고는 식탁에 컵을 내려놨다.


"은지야, 잠깐만 나 따라와봐."

"뭐야, 어딜 가. 너네 집 거실 안방 니방하면 끝인데."

"아니, 우리 집 아니야."

"뭐야. 그게 더 이상해."


툴툴대는 은지가 따라오든 말든 승연은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야, 어디 가냐니까?"


은지가 뒤따라왔다. 깨끗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히 문이 있었는데. 분명히. 내가 그걸 열었는데.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벙쪄있는 승연을 보며 은지는 싱겁다는 듯이 말했다.


"얘가 진짜 왜 이래. 내려가자. 나 주스 한잔 더 갈아줘."

 

'그게 벌써 3년 전이니까.' 수업 종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승연이 "다음 시간까지 69페이지 예제 풀어와라"라는 과학 선생님의 말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생각했다. 화장실에 갈 참이었다. 승연은 그 사이 같은 이름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해사중학교, 해사고등학교. 심지어 운동장도 같이 쓰는 이곳은 그냥 승연이 사는 동네 애들이라면 당연히 다니게 되는 곳이었다. 복도에는 종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뛰쳐나온 아이들로 벌써 정신이 없었다. 저기 멀리서 은지가 뛰어왔다.


"야야야야! 들었냐? 한샘 선배랑 진령이랑 사귄대."


아무렴. 오늘도 은지는 학교를 떠도는 가십거리를 물어왔다. 승연은 대충 놀라는 척하며 손을 씻었다.


집에 갔더니 엄마가 벌써 와있었다.


"왜 벌써 왔어?"

"어, 딸 하교하니? 오늘 회사 보수공사한대서 일찍 가라더라. 그래서 떡볶이랑 순대 좀 사 왔지. 먹을래?"


승연은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아 두 사람이 좋아하는 해사시장 떡볶이를 먹었다. 엄마는 다른 팀 동료가 또 다른 팀 동료랑 알고 보니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여간 다들 부지런히도 산다니까. 나는 일해서 너 먹여살리고 나 먹고 하기도 바빠죽겠는데. 회사에서 사랑이랍시고.. 그 난리를 어느 세월에 친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승연은 문득 엄마랑 은지랑 만나면 이런 이야기로 몇 시간이고 떠들어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네."

"그치? 근데 이것도 자주 먹으면 질려. 잊어갈 때쯤에 또 사 올게. 아 그나저나, 어제 산 멜론이 진짜 달더라. 윗집 좀 갖다주고 오던지."

"통째로?"

"잘라주고 싶긴 한데 좀 귀찮네. 그 집도 칼이랑 도마 있잖아. 알아서 잘라먹겠지."


승연은 베란다에서 멜론을 하나 꺼내 손에 들고는 계단을 올랐다. 멜론이 제법 묵직했다. 그렇게 5층에 올라갔을 때, 승연은 다시 그 문을 만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득 떠오른 문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