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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온트 Jan 18. 2021

우리를 기억하나요(2)

승연은 무서웠다. 동시에 궁금했다. 내가 본 게 헛것이 아니고, 진짜였다는 사실이 갑자기 용기를 주는 것도 같았다. 다시 한번 승연은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끼익-. 몇 해 전 들었던 그 소리가 났다. 얼굴에 끼치는 찬 공기도 똑같았다. 얼마나 깊은지 저 멀리는 보이지도 않는 어둠까지도.


이번에 승연은 그 복도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문 닫힌 그 복도는 매우 조용했다.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공상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승연이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깨닫기도 전에 510호 문이 열렸다. 누군가 나오려다 승연을 발견하곤 멈춰 섰다. 누군가는 문 뒤에서 얼굴을 반쯤만 내보인 채 매우 흥미롭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승연은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얘, 거기서 뭐 하니? 들어왔으면 뭐라도 해야지. 거기 그렇게 평생 서있을래?"


510호 여자는 7옥타브쯤 되는 높고 얇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들어올래? 내가 나가려던 참이긴 했는데. 외부인은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승연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510호 여자는 따뜻한 차를 한잔 내왔다. 찻잔이 여느 골동품 가게에 있을 법한 모양새였다. 귀해 보인다고 승연은 생각했다.


"좀 마셔. 이래 봬도 맛있는 차야. 근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아, 감사합니다. 문이 보여서요. 몇 년 전에 한번 봤는데, 계속 안 보이다가 오늘 보여서."

"으응, 그랬구나? 여긴 외로운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는데. 오늘 좀 외로웠니? 근데 그 외로움이라는 거 기준은 나도 모르겠더라. 제멋대로 인 것 같긴 한데. 근데 손에 든 건 멜론이니?"


승연은 손에 멜론을 들고 있던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 묵직한 게 이렇게 무게감이 안 느껴질 수도 있는 건가.


"아, 네."


다소 민망하게 대답하던 승연은 시선을 돌려 방을 훑었다. 승연이 사는 404호의 반절 쯤 되는 크기에 침대 하나, 책장 하나, 싱크대가 다였다. 다만 이 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몇 안 되는 가구들이 다 고풍스러웠다는 것이다. 낡아 빠졌다는 게 아니라, 오래되어서 더 윤기가 흐르는 고급 가구들.


"방이 좁지? 그래도 혼자서 살만해."

"가구들이 고급스러워 보이네요."

"어, 나 신혼 때 혼수로 샀던 것들 중에 다 버리고 이것들만 남겼어. 이상하게 침대랑 책장은 못 버리겠더라. 내가 필요하기도 하고."


510호 여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해 보였다. 승연은 510호 여자가 내어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엔 달달한 향이 났다가 뒷맛은 좀 씁쓸했다. 그래도 먹을 만했다. 향기가 아주 풍만하게 코를 찔렀다.


"그런데요, 아주머니. 여기. 그러니까 제가 지금 있는 곳. 대체 어디에요? 왜 평소엔 안 보여요? 어떻게 들어왔다 나갔다 하시는 거예요?"


승연은 누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 승연이 귀엽다는 듯 510호 여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여기? 여기는 우리가 사는 곳이야. 잊혀진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잊혀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는 곳이지. 사실 아예 검은 세계로 가도 되는데, 그냥 난 여기가 좋아. 검은 세계랑 네가 사는 세계랑 그 경계에 있는 곳이거든. 나도 분명 네가 사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미련이 남은 거겠지."


승연은 510호 여자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26살에 결혼했어. 아니, 하려고 했지. 그때가 보자. 언제였니. 40년 전인가. 그때면 내 나이가 결혼하기에 그렇게 이른 편은 아니었거든. 다음 주가 결혼식이었는데 글쎄 그 사람이 잠깐 보자고 하더라. 밤이었고, 나는 이제 자려고 막 침대에 누운 참이었거든.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알 것 같은 거. 그게 뭔지 아니? 그걸 사람들이 직감이라고 하는 건가 봐. 한겨울이었는데, 외투를 안 걸쳐도 몸에서 자꾸 열이 나서 춥지도 않더라. 그렇게 잠옷 바람으로 아파트 앞에서 그 사람을 만났어. 그 사람이 도무지 용기가 안 난다고 그러더라. 나랑 결혼해서 살아갈 용기가 안 난대. 난들 뭐 용기가 났겠냐고. 내 눈을 바라보지도 않고 땅만 보면서 용기가 안 나. 미안해. 근데 도저히 안 나. 이러다가 갔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참 웃기지 않니? 나는 그날 울지도 않았어. 대신에 몸 전체에 공허가 들어찼지. 그날 이후로는 뭐가 맛있는 음식인지도 모르겠고, 남들은 웃는 데 나는 웃긴지도 모르겠고, 한여름엔 푹푹 찌는 열대야가 온다는데 더운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그새 시간이 훌쩍 지나서 엄마 아빠는 흰머리가 가득한 노인이 되어있더라. 돌이켜보면 그래. 26살이면 참 어리잖니. 그 어릴 때 잠깐 겪은 그 사랑이 뭐가 그렇게 진득하게 내 삶에 딱 붙어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사람이랑 2년 만났거든. 그 2년이라는 시간이 내 평생을 잡아먹은 거지. 모르겠어. 그 사람도 나처럼 이러고 살고 있을지."


510호 여자는 승연의 얼굴에 비친 당황스러움을 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루에 꼭 해야만 하는 말의 양이 정해져 있다면, 510호 여자는 한 달 내내 말하지 않고 쌓아둔 그 정량을 풀어내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뜨니까 갑자기 한기가 드는  있지. 그러고는 집에 소포가 도착했어. 박스를 열어보니까 편지  통이 들어있는 거야. 그럼 편지봉투로 보내지  하러 박스로 보냈을까. 나는   와중에 그런  생각했네. 그나저나,  편지에 이렇게 써있더라고. 검은 세계에 가서 다시 무언가를 느끼고, 공허는 지운 채 살지, 아님 이 상태로 경계에 남아서 가끔은 살던 곳을 왔다 갔다 할지 선택하라고. 나는 그때 아무것도  느꼈다고 했잖아. 그러는데 검은 세계에 가서  다시 느껴볼  있다 한들 그게 끌리지가 않더라고. 엄마 아빠도 걱정됐고. 그래서 경계에 남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생각만 했는데, 바로 그다음 소포가  오더라. 초인종이 띵동해서 문을 열었더니 박스가 덩그러니 있는  있지.  안에  편지가 있어서 뜯어봤더니 그럼   말까지 여기 510호로 이사하면 된다는 거야. 가져오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가져와도 된대. 그래서 나는 가구점 창고에 쌓아놨던 신혼 가구들 중에 침대랑 책장만 가지고 여기 들어왔어. 엄마 아빠한테는  이제 정신 차렸으니 독립해서  살겠다.   마디 하고 나왔지. 요즘도 가끔 가서 엄마 아빠  밥해드리고   살고 있다.  마디 하고 . 방금도 엄마 아빠 집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


510호 여자는 문득 시계를 보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면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510호 여자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승연도 시계를 보고는 놀라 일어섰다. 벌써 저녁 7시 반. 엄마랑 떡볶이를 먹은 게 4시였으니까 3시간 반이 흐른 셈이었다.


"다시 나가는 법은 알지? 너는 거기로 나가면 돼. 나는 나가는 길이 좀 달라서. 그나저나 반가웠어. 다음에 또 오게 되면 차 마시러 오렴."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두 사람은 같이 510호 문을 나섰다. 510호 여자는 왼쪽으로, 승연은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승연은 나가는 문을 열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똑같이 차가운 공기가 볼을 스쳤고, 저 멀리 복도 끝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510호 여자의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는 것. 그거 하나가 달랐다.


승연은 문을 열고 나와 504호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철컥 열리더니 은주네 아주머니가 반가운 얼굴로 승연을 맞았다.


"어머, 승연이 왔니? 저번에 준 김치는 다 먹었고?"

"아, 아직요. 오늘은 이거 엄마가 갖다주라고 하셔서."


승연은 오른쪽에 들고 있던 멜론을 은주네 아주머니에게 내보였다. 분명히 그 복도에서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문득 승연은 멜론의 무게가 다시 느껴졌다.


"이게 뭐야? 멜론? 세상에, 이거 비싼 과일이잖아. 잘 먹을게. 엄마한테도 안부 전해드리고."

"네, 알겠습니다. 가볼게요."


승연은 계단을 내려가며 엄마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했다. '은주네 아주머니가 갑자기 떡 좀 먹고 가래서 먹고 왔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은주네 아주머니가 엄마한테 그런 적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승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저 멀리 베란다에서 승연을 맞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갔다 왔어? 세상 빠르네. 야, 떡볶이가 양이 좀 많았나 배가 너무 부르다. 넌 안 그러니?"


승연은 식탁 맞은편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4시 2분이었다.


그날 밤 승연은 일기장 뒷면에 검은 세계. 외로움. 문. 이 세 단어를 적어놓고는 연필로 일기장을 툭툭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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